우수절의 시
◇박재두◇
한 장 창호지 밖에 나직이 듣는 음성
어린 날 그 언덕에 흘리고 온 꿈의 씨앗
향 맑은 귀가 열리어 이젠 움이 돋는가.
돌아온 산모롱이 구비 구비 짓다 둔 인연
원수도 손끝이 저려 맺힌 허물 고를 풀고
한 떨기 민들레처럼 떨고 일어나는가.
죄 없이도 가슴 닳던 그리움도 벗어두고
묵밭된 마음의 이랑 새로 닦은 보습을 대어
묵혔던 길이 열리어 기적처럼 오실 손님.
비 그치면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이 밤
옥색 치맛자락을 끄는 꿈길도 결이 맑고
청매화, 새 피가 돌아 숨소리도 고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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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두=(1936~2004)경남 통영 출생
196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목련(木蓮)’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단
이호우시조문학상, 정운시조상, 성파시조문학상, 가람시조문학상, 육당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대표작으로 ‘꽃은 지고’, ‘바람 없는 날’, ‘때 아닌 구름’ 등
우수는 한자로 써야 제 맛이다. 雨水, 비 내리는 모습에 소리까지 겹쳐지는 묘한 울림. 긴
겨울의 끝을 알리는 소리에 봄빛을 얹어 듣기 때문이겠다. '한 장 창호지 밖에 나직이 듣던
음성'이야 옛 얘기지만, 우수절 빗소리는 꽃 소식처럼 임 소식처럼 여전히 반가운 봄의
전령이다.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우수 빗소리 따라 남북의 두꺼운 얼음도 풀리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면 명절에 하염없이 북녘이나 바라보던 깊은 수심도 다 풀릴 텐데…. 오래된 그리움
들에 '새 피가 돌아' '청매화' 같은 봄으로 피어나길 다시 또 간절히 불러본다.
정수자 시조시인 [가슴으로 읽는 시조]
Chosun.com/2015.0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