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국민에게 감사드립니다**

2011. 11. 18. 20:44◈느낌있는글

 

 

 

 

 

    1. 참전경위

 

         태국은 유엔이 한국 군사원조를 결의하자 6월 30일 미곡지원을 유엔에

         통보하였고 유엔 사무총장이 7월 14일 지상군의 파견을 요청하자 7월 20일

         1개 여단 규모인 지상군 4,000명의 파견을 유엔에 통보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유엔군의 북진으로 전황이 호전되자

         지상군은 1개 대대규모로 축소되었다.

         태국 해군은 1950년 10월 22일 1개 대대규모의 지상군과 추가로 파견될

         적십자 의무대를 싣고 16일간의 항해 끝에 11월 7일 부산에 입항하였다.

 

         지상군을 수송한 해군도 사세보로 이동하여 극동해군의

         제95기동부대에 배속되었다. 태국은 지상군과 해군을 파견한데 이어

         1951년 6월 18일 1개 수송기편대와 항공의무대를 일본 타치카와에 있는

         미 공군 제374비행단에 배속시킴으로써 명실 공히 6.25전쟁에 육·해·공군을

         파견한 다섯번째 국가가 되었다.

 

 

    2. 지상군의 활동

 

         대대는 1950년 12월 5일 평양으로 이동하여 개성 일대에서 유엔군의 철수를

         엄호한 후 12월 13일 제8군 예비가 되어 수원으로 이동하였다.

         중공군이 신정공세를 개시하자 대대는 1월 2일 서울 북쪽 신둔리로

         진출하여 영 제29여단에 배속되었다. 3일 1개 중대 규모의 중공군이 제29여단

         지휘소로 침투하자, 대대는 참전 이후 처음으로 중공군과 격전을 벌여 이들을

         격퇴한 후 여단 주력과 함께 한강을 건너 수원으로 철수하였다.

 

         대대는 미 제1기병사단에 배속되어 3월 7일 재반격작전을 실시하고

         4월 3일 화천저수지로 진출하였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22명을 생포하고

         포로로 잡혀 있던 미군 4명을 구출하였으나, 대대도 전사 1명, 부상 11명의

         손실을 입었다. 춘계공세를 개시한 중공군이 4월 28일 서울 진출을 기도하자

         대대는 창동 일대에서 밤새도록 격전을 벌여 중공군 32명을 사살하였다.

 

         이후 대대는 중공군을 추격하여 7월 31일 율동리 부근으로 진출하였다.

         이때 제2중대는 8월 18일 역곡천 남쪽의 346고지 부근에서 적집결지를

         기습하여 70여 명을 사살하고 다량의 보급품을 파괴하였다.

 

 

 

        이후 대대는 철원 서쪽의 티본(T-bone) 고지 남쪽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11월 13일 자정 무렵 전차로 증강된 2개 중대 규모의 중공군이 전초소대를

        기습공격하였으나 전초소대가 백병전을 벌여 중공군 30여명을 사살하여

        격퇴하였다. 이때 미 제1기병이 일본으로 복귀함에 따라 태국대대는

        12월 15일 미 제2사단 제9연대로 배속이 변경되었다.

 

        1952년 전반기동안 대대는 김화 서쪽 탑골 부근과 갈화동에서

        정찰과 매복활동을 벌였으나 특별한 접전은 없었다. 부대를 정비한 대대는

        10월 22일 호막리로 이동하여 주저항선에 배치되었다.

        10월 27일 자정 무렵 1개 소대로 주 저항선 전방 복개고지를 기습하여

        중공군 20여 명을 사살하고 3명을 포로로 잡았다. 중공군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11월 1일 어둠이 깔리자 포크찹(Porkchop)고지를 집중포격한 후

        21:00경 2개 중대 규모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 전투는 대대가 참전한 이후 치른 가장 치열한 전투로서 확인된 적 시체만

        50여구나 되었고, 대대도 8명이 전사하고 14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제8군은 태국 장병들의 용맹성을 인정하고 '작은 호랑이(The Little Tigers)'

        라는 애칭까지 지어 주었다.

 

        중공군은 휴전회담 이전에 김화 북쪽의 사동 지역을 수중에 넣기 위하여

        1953년 7월 17일 해가 지자 대대지역을 집중 포격한 후 22:00경 2개 중대

        규모로 한탄강을 건너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대대가 이를 격퇴하였다.

 

 

   3. 해군의 활동

 

        극동해군에 배속된 태국의 프리깃함 파라새(Prasae)호와

        방파공(Bangpakong)호, 그리고 수송선 시창(Sichang)호는

        1950년 12월 말까지 사세보 미 해군기지의 수로 엄호작전에 투입되었다.

 

        파라새호와 방파공호는 1951년 1월 3일 동해로 출동하였다.

        그러나 1월 7일 아침 거친 파도가 엄습하여 파라새호는 38도선 16km 북쪽

        속초 부근 해안에 좌초되었다. 좌초된 함정을 구조하기 위하여

        사력을 다하다가 2명이 전사하고 23명이 부상을 입었다.

 

        제95기동함대 사령관은 파라새호를 보수하여 사용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18:00에 함포사격으로 파라새호를 격침시켰다.

        7월 15일 수송선인 시창호가 태국 정부의 요청을 귀국함에 따라 태국 함정은

        방파공호만 남게 되었다.

 

         이때 태국은 미국으로부터 프리깃함 2척을 지원받아

        10월 29일 파라새(HMTS Prasae II)호와 타친(HMTS Tachin)호로 명명하였고,

        12월 20일 까지 해상훈련에 주력하였다. 이후 태국 함정들은 특별한 상황 없이

        휴전협상이 조인된 1953년 7월 27일까지 주로 수송선단 엄호작전과 함정의

        정비 및 보급을 반복하면서 허신적으로 유엔 해군의 작전을 지원하였다.

 

 

 

 

   4. 공군의 활동

 

        1951년 6월 13일 태국의 C-47 수송기 3대가 미 제135비행사단

        제374병력수송비행단 제21비행대대에 배속되어 6.25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당시 미 공군이 보유한 C-47 수송기에는 병상 또는 의료설비가 없었으며,

        C-54 수송기는 활주로가 짧은 한국 비행장에서는 운용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로 인해 소형이며 의료설비가 구비된 태국 수송기들이 긴급 후송임무를

        전담하게 되었다. 이때 수송기 대대는 주로 한국에서 일본으로 중환자들을

        후송하였다 1952년에 접어들면서 미 극동공군은 수송능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C-54 수송기를 C-124 수송기로 교체시켰다.

 

        그러나 한국에는 C-124 수송기의 이착륙이 가능한 활주로가 4곳 밖에 없어

        태국 수송기의 활동은 오히려 증가되었다.

        1953년 2월부터 김포비행장에 주둔중인 그리스 수송대대가 한국내 수송임무를

        전담함에 따라 태국 공군은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주로 일본내

        각 공군기지간 병력 및 보급품 수송임무를 수행하였다.

 

        태국은 6.25전쟁에 3,650명이 참전하여

        전사 129명, 부상 1,139명의 손실을 입었다. 휴전 후 지상군은 1개 중대만

        잔류시키고 주력부대는 1954년에 철수하였다. 해군은 1955년 1월에, 공군은

        1964년 11월에 철수하였으며 최종 잔류부대도 1972년 6월에 철수하였다.

 

 

      5. 기념비

                                           (1) 38선 돌파 기념비

 

 

                    6.25전쟁 당시 태국 제21보병연대 제1대대 장병들의 자유수호와

                    38선 돌파작전의 무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제70전차부대

                    제191소대에서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 타일랜드 참전기념비

 

                    태국은 6.25전쟁에 다섯번째로 육·해·공군을 파견한 국가로서

                    율동리 전투, 포크찹고지 전투, 김화 351고지 전투 등의

                    전투를 치루었다. 국방부는 태국군의 참전과 전몰용사

                    1,296명의 넔을 기리기 위하여 이 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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