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나온詩(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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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의 시] 연대-이영주(1974~)**
연대 ◆이영주(1974~)◆ 어둠이 쏟아지는 의자에 앉아 있다. 흙 속에 발을 넣었다. 따뜻한 이삭. 이삭이라는 이름의 친구가 있다. 나는 망가진 마음들을 조립하느라 자라지 못하고 밑으로만 떨어지는 밀알. 옆에 앉아 있다. 어둠을 나누고 있다. 시집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문학과지성사) 中 ============================================================================== 밀알이 싹을 틔우고 자라난 이삭은 내 친구의 이름입니다.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우리는 너와 나의 이름으로 공동체를 이루고 서로 어둠을 나눕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주는 것. 곁에서 믿음과 희망으로 함께 성장하여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존재..
2020.09.02 -
**먼 산-박경희**
먼 산 ●박경희● 아파트로 이사한다는 소리를 들었는지 사나흘 밥도 안 먹고 먼 산만 바라보는 개 십년 한솥밥이면 어슬녘 노을도 쓸어준다 고개 묻고 시무룩한 모습이 안쓰러워 내 생일에도 끓여주지 않던 소고깃국을 밥그릇에 넣어준 어머니도 먼 산이다 갈비뼈 휑하니 바람이 들락거리는 어머니와 개는 한솥밥이다 저물녘 노을빛 강이다 같이 갈 수 없는 공중의 집이 먼 산에 걸쳐 있다 개장수에게 보낼 순 없다고 가면 바로 가마솥으로 간다고 아버지가 아끼던 개라고 서로 마주 보다가 한숨으로 날리는 먼 산이다 ========================================================== 마당도 뒤란도 없는 공중의 집.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지만, 큰 뜻 품은 한신의 후예인지 ..
2020.08.05 -
**바다와 나와 女人-성낙일**
바다와 나와 女人 ◆성낙일◆ 여인아 우리 일생에 단 한번은 하늘과 바다가 어울린 그 기슭에 초롱같은 우리 둥지를 틀자. 날개 있는 것들이 놀라지 않게 하늘과 물빛 지붕을 올리고 해 뜨고 지는 곳으로 창을 내자. 싱싱한 바다의 비린내 맡으며 너는 조개 줍고 나는 고기잡고 우리 그렇게 푸른 나이로 살자. 바다가 그어놓은 파도의 음계 위에 물오른 고기가 통통 몸을 튕길때면 나는 노래를 부를께, 너는 춤을 추렴 별이 이마 위에서 빛날 때까지......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 많은 밤은 하늘처럼 바다처럼 사랑하자 서로를 보다 닮아버린 공간에서 바다에 별을 내려놓으면 하늘에 그물을 던지듯.
2020.07.31 -
**[시가 있는 월요일] 당신은 내 몸속을 흐른다-김정수**
당신은 내 몸속을 흐른다 ◇김정수◇ 유장한 이야기 범람하는 강변은 말고 부산한 파도 소리 폭풍의 해안도 말고 조곤조곤 당신을 들어주기에는 봄밤의 시냇가가 적당하다 내 몸에서 당신은 조그맣게 흐른다 - 김정수 作 `봄밤` ====================================================================== 봄밤의 풍경으로 이만한 게 있을까. 연인들이 시냇가에 앉아 조곤조곤 속삭이는 풍경이란…상상만 해도 감미롭고 평화롭다. 장마철 범람하는 강물 같은 사랑도 있고, 바닷가에 불어닥치는 폭풍 같은 사랑도 있겠지만 그래도 역시 사랑은 잔잔해야 맛이다. 밤에도 각자 색깔이 있다. 여름밤은 여름밤대로, 겨울밤이나 가을밤은 또 나름의 색깔이 있다. 그중 봄밤은 잔잔한 시냇물을 ..
2020.06.02 -
**[장석남의 시로 가꾸는 정원](112)방언(方言)**
방언(方言) ―김성규(1977~ ) 점자를 읽듯 장님이 칼을 만진다 칼날에 피가 번진다 사람들이 소리 죽여 웃는다 칼은 따뜻하다! 자신이 새긴 글씨가 상처인 줄 모르고 기뻐하는 장님을 보라 쏟아지는 피를 손바닥으로 핥으며 자신도 모르는 글씨를 칼날에 새기고 있다 몸에서 잉크가 떨어질 ..
2020.05.14 -
**[시로여는 수요일] 소화기**
소화기 ♥박동덕♥ 종종 찾아가 먼지라도 털어주자 할머니는 다급하면 며느리를 찾았고 아버지는 여차하면 여보를 불렀고 아이들은 궁하면 엄마를 불렀지 푸르든 그 마음 붉게 물들이고 오늘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급한 불이 없는지 찾는 손길 없어진 지 오래 먼지를 하얗게 ..
2020.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