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싶은詩(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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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를 잡아-신현정**
무지개를 잡아 ◆신현정◆ 이제라도 무지개를 잡아야겠다는 것이야 무지개를 잡았다 하면 적어도 일곱 색깔 그대로 일곱 번은 친친 감아쥐고서 방금 세차게 지나간 소나기마저 비틀어 짜내고서는 그래놓고서는 지상에 던져놓는다는 것이야 어디로 보나 공작새로는 훌륭하겠지 사육하는 거야 모이를 뿌려주면서 그래서 정오만 되면 날개를 활짝 편다는 도도한 그걸 내가 쪼그리고 앉아서 공작새를 즐기겠다는 것이야. ============================================================================= 당신이 잡아놓았던 무지개, 어디서 자라고 있나요. 눈부신 일곱 빛깔 뽐내며 어디서 상서로운 열매를 쪼고 있나요. 촤르르~ 깃 한 번 펼치면 먹구름 걷혀 오십 일 장마가 그치고, 촤르..
2020.09.16 -
**사는 게 참, 참말로 꽃 같아야-박제영**
사는 게 참, 참말로 꽃 같아야 ◆박제영◆ 선인장에 꽃이 피었구만 생색 좀 낸답시고 한 마디 하면 마누라가 하는 말이 있어야 선인장이 꽃을 피운 건 그것이 지금 죽을 지경이란 거유 살붙이래도 남겨둬야 하니까 죽기 살기로 꽃 피운 거유 아이고 아이고 고뿔 걸렸구만 이러다 죽겠다고 한 마디 하면 마누라가 하는 말이 있어야 엄살 좀 그만 피워유 꽃 피겠슈 그러다 꽃 피겠슈 봐야 사는 게 참, 참말로 꽃 같아야 ============================================================================ 대나무는 생의 절정에서 단 한 번 꽃을 피우고 죽는다. 백 년 만에 꽃을 피우는 용설란도 가장 높고 화려한 꽃차례를 하늘 끝까지 밀어 올려 꽃 폭죽을 터트리고 죽는다...
2020.08.24 -
**세상에 공짜가 어딨나요-김은경**
세상에 공짜가 어딨나요 ◆김은경◆ 아부지 이제 아무 전화나 받고 공짜로 뭘 준다고 해도 듣지 마세요 예, 아부지? 이거 이 년 약정이니까 해지 못 해요 이 년 동안은 무조건 이거 쓰셔야 해요 안 그러면 또 위약금 물어야 해요 - 그랴 내가 그날 뭐에 씌어서 그런데 내가 이 년은 살 수 있을랑가 모르겄다 그 대목에서 왜 웃음이 났을까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책 제목처럼 죽고 싶지만 새 핸드폰은 갖고 싶은 마음 그 마음 때문에 실실 웃음이 난다 농담과 진담을 구별할 수 없는 날들 어제 놓친 버스를 오늘도 놓친다 ======================================================================= 고객님.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곧 차세대 5G 통신망 기지..
2020.08.10 -
**숲속의 장례식-최창균**
숲속의 장례식 ◆최창균◆ 죽은 나무에 깃들인 딱따구리 한 마리 숲을 울리는 저 조종 소리 푸른 귀를 열어 그늘 깊게 듣고 있는 고개 숙인 나무들의 생각을 밟고 돌아 다음은 너 너 너 너 넛, 다시 한번 숲을 울리는 호명 소리 한 나무가 죽음의 향기로운 뼈를 내려놓는다 따르렷다 따르렷다 딱따구리 한 마리가 숲을 뚫는다 마침내 그 길을 따라 만장을 휘날리는 나무의 행렬들 ========================================================================== 나무들은 싹이 터서 죽을 때까지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한다. 평생 태양을 숭배하며 한 뼘씩 수직의 계단을 올라간다. 어떤 나무도 궁극 태양의 사원에 당도하지 못하지만 저마다 자신의 정점에서 죽는다. 나무들은 ..
2020.07.29 -
**미니 붕어빵 민희 씨-박형권**
미니 붕어빵 민희 씨 ◆박형권◆ 붕어빵 민희 씨가 빵틀을 돌린다 누구나 직업으로 세상을 헤엄치듯 민희 씨도 세상 위에 연탄 한 장 올려놓고 우리 골목 초입을 열기로 데운다 오늘도 민희 씨는 눈이 많이 내리면 이글루를 지어 들어가서 자겠다던 낭만주의자를 생각한다 차가움을 쌓아올려 더운 열기를 만드는 추운 나라의 건축기술처럼 알코올을 쌓아올려 염병할 행복을 지으려다 술병의 탑을 쌓고 만 그를 생각한다 민희 씨가 데워놓은 훈기에 안겨 꿈의 끝까지 헤엄쳐간 이글루 아직도 눈이 내리면 슬픔도 축포처럼 황홀하다 겨울이 가기 전에 민희 씨는 팥소 같은 꿈들에게 지느러미를 달아준다 혼자 올 때는 물풀을 생각하고 둘이 올 때는 물풀들을 생각하는 집으로 가는 길목 어서 저어가라고 지느러미를 달아준다] 민희 씨의 귀 뒤에는..
2020.07.25 -
**언니들과의 저녁 식사-김해자**
언니들과의 저녁 식사 ◆김해자◆ 밥 먹으러 오슈 전화 받고 아랫집 갔더니 빗소리 장단 맞춰 톡닥톡닥 도마질 소리 도란도란 둘러앉은 밥상 앞에 달작지근 말소리 늙도 젊도 않은 호박이라 맛나네, 흰소리도 되작이며 겉만 푸르죽죽하지 맘은 파릇파릇한 봄똥이쥬, 맞장구도 한 잎 싸 주며 밥맛 없을 때 숟가락 맞드는 사램만 있어도 넘어가유, 단소리도 쭈욱 들이켜며 달 몇 번 윙크 하고 나믄 여든 살 되쥬? 애썼슈 나이 잡수시느라 관 속 같이 어둑시근한 저녁 수런수런 벙그러지는 웃음소리 불러주셔서 고맙다고, 맛나게 자셔주니께 고맙다고 슬래브 지붕 위에 하냥 떨어지는 빗소리 ============================================================================ 다 저녁..
2020.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