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밭 연가.....♤
언제부터인지
봄이면 낯선 그리움에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끼곤 했다.
특히 어디라도 여행을 하다가 바람을 앞세우고 빈 들을 걸어갈 때면
예전 같으면 이 자리에 보리밭이 있었을 텐데...
그런 상념에 빠져드는 것이었다.
그 많던 보리밭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아직 이른 봄, 산이나 들이나 아직 색이 익지 않은 때
유독 보리만이 푸르른 기상을 나부끼는 깃발이 아니었던가.
누구라도 봄 들판에 서보면 알게 될 것이다.
빈 들에 보리밭이 있고 없고가 풍경을 얼마나 바꾸어 놓는지를.
두렁에 자운영 꽃 숯불처럼 피어나고
꽃뱀 어슬렁어슬렁 고랑을 기어 다니는 곳.
종달새 울다가 보리밭으로 들어가고 나면
꽃바람 불어와 새 울음 따라가며 보리밭으로 사라진 이후...
소리도 없고 모습도 없고 흔들리는 보리밭 뿐인
그 푸른 바다를.
싱그럽다는 말이 보리밭 위에 쏟아지는 햇살을 두고 말할 때보다
아름다운 쓰임새가 있을까.
초록이라는 말이 싱그러운 햇살을 받은 보리가
보여주는 색을 일컬을 때보다
우리 눈과 귀에 더 흡족할 수 있을까.
찬란한 봄을 구가하는 보리에게는
그러나 고난의 겨울이 있었음을 우리는 안다.
겨울논의 언 땅을 살아가는 보리들...
북풍한설을 견디느라 바짝 엎디어 사는 처참한 세월이었다.
보리인들 봄꽃 가을나무처럼 당당하게 살고 싶지 않았겠는가.
긴 겨울동안 보리는 마치 설산고행(雪山苦行)하는 고승처럼
몸은 야위고 생명은 사위어갔다.
뿌리가 얼면 죽는다.
어떻게든 뿌리만큼은 땅 속에 박아야 한다.
그 약속을 기억하라. 너에게는 찬란한 봄이 있음을.
머지않아 너의 봄이 올 것임을.
보리밟기라는 것이 있었다.
아직 땅은 얼어 서릿발이 무서운데
그렇잖아도 보기에 안쓰러운 어린 보리 싹을 꼭꼭 밟아주었다.
밟혀야 잘 자란다는 어린 보리의 생애,
생각해보면 마음이 짠하다.
얼마 전 탄천 변으로 바람 쏘이러 나갔다가 자운영(紫雲英) 꽃을 보았다.
다른 풀섶에 가려 피어난 꽃 한 떨기였다.
예전의 너른 자운영 밭만 생각하다가 설마 하면서 그냥 지나칠 뻔했는데
아무래도 휘감아오는 느낌이 예사롭지 않기에 멈추어 살펴보니
자운영이었다.
옛님을 보는 듯 반갑고 기뻤다.
자운영 한 송이를 보며 자운영 밭을 뒹구는 꿈을 꾸었고
종달새 소리를 들었고 보리밭의 큰 파도를 보았다.
봄만 오면 수런수런 가슴이 들뜨는 나의 방랑 속에 보리밭이 있었음을
그때 알 수가 있었다.
보리밭은 그냥 보리밭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보리 말고도 다른 이들도 공존하고 있었다.
누구랑 누구랑 보리밭에서 어쩌고저쩌고...
제가 분명 두 눈으로 보았다고 떠들어대는 보리밭 파수꾼들이 많았다.
쫑알쫑알 종달새도 그랬고 깨굴깨굴 개구리도 그랬다.
우물가에서 아낙네들은 짓이 나서 더 떠들어댔다. 숫제 핏대를 세웠다.
이제 보리밭에 숨어도 찾는 사람이나 있을까.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내년 봄에는 보리밭 가를 꼭 거닐어봐야겠다.
자운영 꽃 기막히게 핀 논두렁을...
신영길의 "보리밭 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