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향기 / 원무현
보수동 헌책방골목이 하루를 닫는다 자정, 일제히 내려지는 철제문 이윽고 눈을 뜨는 정적 지식을 탐하며 몰려다니던 빛나는 눈동자들 떠나고 59개 책방들이 너나없이 입을 굳게 닫는 이 골목의 0시는 이 세상엔 없는 세계가 열리는 시각
외부세계와 차단된 책방 내부는 댐의 물밑처럼 어둡다 자정이 지나면 지은이의 피조물들이 하나 둘 셋 넷…… 수초 속 물고기처럼 문자의 숲에서 빠져나온다
오늘은 2500년 전 혓바닥을 뽑아내고 새로운 혓바닥을 해 넣은 정비석의 손무와 최인호의 공자가 만난다 기원전의 모습으로 21세기의 언어를 사용하며 병법과 군주론을 놓고 격론을 벌일 것이다
거품을 물었던 난상토론이 끝난 아침 셔터가 올려 지면 그들의 입 냄새가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 냄새에 이끌려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다 코를 벌름거릴 것이다, 책 향기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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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무현=2004년 시집 '홍어'로 작품 활동. 시집 '사소한, 아주 사소한' 등.
〈시작 노트〉 보수동 책방골목에 사람들이 이끌리는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일까. 오늘도 나는 그 골목에 갈 생각이다. 사야 할 책이 있는 것도 아닌데 가고 싶다. kookje.co.kr/2014-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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