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새벽에 바친다 내
정갈한 절망을,
방금 입술 연 읊조림을
감은 머리칼
정수리까지 얼음 번지는
영하의 바람, 바람에 바친다 내
맑게 씻은 귀와 코와 혀를
어둠들 술렁이며 포도(鋪道)를 덮친다
한 번도 이 도시를 떠나지 못한 텃새들
여태 제 가슴털에 부리를 묻었을 때
밟는다, 가파른 골목
바람 안고 걸으면
일제히 외등이 꺼지는 시간
살얼음이 가장 단단한 시간
박명(薄明) 비껴 내리는 곳마다
빛나려 애쓰는 조각, 조각들
아아 첫새벽,
밤새 씻기워 이제야 얼어붙은
늘 거기 눈뜬 슬픔,
슬픔에 바친다 내
생생한 혈관을, 고동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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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강=(1970∼ )광주 출생 1993년 계간 '문학과
사회'에 시가,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 산문집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2007)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등이 있다
얼음을 와작와작 씹어 삼킨 듯 서늘해지는 시다. 한강의 첫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서 옮겼다. ‘피 흘리는 언어로 뜨겁고도 차가운’ 시들을 읽으면서
그의 참담한 시간을 엿보는 듯했다. ‘희랍어 시간’에서 ‘소년이 온다’까지, 한강씨
는 점점 소설을 잘 쓴다고 감탄했는데, 예술은 삶의 고통을 담보하게 마련인가….
‘내가 가장 처절하게 인생과 육박전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헐떡이며
클린치한 것은 허깨비였다 허깨비도 구슬땀을 흘렸다 내 눈두덩에, 뱃가죽에 푸른
멍을 들였다/ 그러나 이제 처음 인생의 한 소맷자락과 잠시 악수했을 때, 그 악력
만으로 내 손뼈는 바스러졌다’.(시 ‘그때’)
불행에 대한 체감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큰 불행을 겪으면 삶이 망가지기
쉽다. 우선 불행 자체가 고통이고, 자기가 불행한 사람에 속한다는 사실이 수치심
과 열패감의 나락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 불행은 삶에 대한 시야를
넓히고 감각을 깊게 한다. 예민하고 명민하고 강한 사람인 시인은 그렇게 다시
떨치고 일어난다. 박명(薄命)을 박명(薄明)으로 만든다. ‘첫새벽에 바친다 내/
정갈한 절망을!’
화자는 영하의 바람이 부는 새벽거리에 나선다. 감은 머리를 말리지도 않고! 왜?
그 오랜 밤의 절망과 슬픔을 정갈하게 갈무리하려고. 정수리까지 살얼음지는 그
감각으로 단단한 걸음을 내딛는 첫새벽이다.
[황인숙시인의 행복한 시 읽기]<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