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자색 꽃물이 흥건히 들어차
두레박으로 질러먹던
두멍 물 길어 채울 때마다
시퍼렇게 솟던 아버지
풀벌레 질금거리던 여름 홀랑
달빛 눈부시게 씻어 당긴 샘
석 질이나 차던 물길 돌아누워
먼저 간 식구들 생각에
물 끝은
늘 그리움을 상처내고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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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순=(1964∼ )충남 태안 출생
2011년 ‘시와 사람’으로 작품활동 시작
짧은 장마가 지났다. 햇빛에 환호작약하는 듯 매미울음 소리 자지러진다. 목이 바짝
마르다. 집에 넘쳐나던 생수가 다 떨어졌다. 이 염천에 무겁기 짝이 없는 생수를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 5층으로 배달시키는 건 못할 짓이라 자제한 결과다. 수돗물
이라도 마셔야겠다. 페트병에 든 ‘아리수’는 마시면서 수도꼭지에서 받아 마시는 건
왜 내키지 않는지 모르겠다. 언제부터 물을 사 마셨다고….
‘저드래’는 시인의 고향인 충남 태안군에 있는 마을이다. 구기자 꽃피면 ‘담자색 꽃물
이 흥건히 들어차’던 ‘억새 너울진 샘’은 시인에게 고향의 상징이다. 머나 가까우나
마을사람들이 ‘두레박으로 질러먹던’ 깊은 샘. 거기서 ‘풀벌레 질금거리던 여름’이면
달빛 아래 홀랑 벗고 몸을 씻었지. ‘두멍 물 길어 채울 때마다/시퍼렇게 솟던 아버지’,
그 샘은 시인의 혈기방장 젊은 아버지의 상징이기도 하다. 두멍은 물을 많이 담을 수
있는 큰 항아리로 수도가 귀하던 시절의 중요한 부엌세간이다.
지금은 생활의 멋을 아는 호사가의 집에서 부레옥잠을 띄우고 있을 테다. ‘석 질(세 길)
이나 차던 물길’ 왜 돌아누웠을까? 그 물을 퍼서 두멍을 채우던 사람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리라. 아니면 무슨 용수로 다 빼가서 고갈된 것일까. 맑고 깊은 샘은 사라지고,
생명의 물 찰랑거리던 아버지도 어머니도 가셨다. 산천이라도 의구하면 지금은 없는
사람들이 상처 없이 그리울라나. ‘물 끝’, 바닥난 샘에 방울방울 샘물인 듯 눈물이
흐르고, 화자의 마음에 그리움이 아릿아릿 피어오른다.
[황인숙시인의 행복한 시 읽기]<289>
dongA.com/2014-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