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옳다는 것은
그것뿐
겨울햇빛 너는
지상의 허튼 나뭇가지들의 고귀한 인내를
밤새워 달랠 줄도 모르고
조금 어루만지고 간다
이 세상에서 충만이란 이런 섭섭함인가
겨울햇빛 너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고 그냥 간다
지식이 무식보다 얼마나 유죄인가
정녕 그렇겠다
겨울햇빛 너로 하여금
이 세상의 모든 얼간이들이
한동안 싸우지 않고
한동안 피 흘리지 않을 어느 날을 꿈꾸고 온
겨울햇빛 너는
나를 지우지 않고 우선 내 그림자를 지우고 간다
통곡인들
오열인들
내 절규인들 들어주는 곳 전혀 없다
겨울햇빛 내가 간 뒤
내 쇄골로 겨울밤을 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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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1933~ )(高銀, 본명 고은태(高銀泰) 전북 군산 출생
1952년 입산하여 일초(一超)라는 법명을 받고 불교승려가 되었다.
이후 10년간 참선과 방랑을 거듭하며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1958년 조지훈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폐결핵》을 발표하며 등단
60년대 초에 본산(本山) 주지, 불교신문사 주필 등을 지냈고,
1960년 첫 시집 〈피안감성〉(彼岸感性)을 내고 1962년 환속하여
본격적인 시작활동에 몰두하게 되었다.
‘지식인’이란 지식을 그 빛과 온기로 지구 생명체를 살리는 태양이라 생각하는 이들이다.
그래서 자신이 쌓은 지식으로 세상의 몽매를 깨워 보다 살 만하게 만들고자 한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세상에 앎을 전하는 게 그들의 소명이지만, 그 앎을 실천하라고 함부로
흔들어 깨우는 건 깨어난 이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현명한 지식인은 한겨울에 ‘흙 속의 씨앗들을 괜히 깨우지 않는다’. 그렇다고 두 손 놓고
있는 게 아니다. 섣불리 싹을 내밀지는 않게, 그러나 아주 얼어 죽어 버리지는 않게, ‘가
만가만/그 씨앗들이 잠든 지붕을 쓰다듬고 간다’. 때로 그것이 비겁함으로 보일 수도 있
지만, 신중하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고 그냥’ 가는 게
겨울의 지혜일 테다.
화자에게 세상은 지금 통곡과 오열과 절규로 가득한데, 그걸 ‘들어주는 곳 전혀 없’는 겨
울이다. 이 혹한을 버티는 ‘지상의 허튼 나뭇가지들의 고귀한 인내를/밤새워 달랠 줄도
모르고/조금 어루만지고’ 갈 뿐인 지식인의 곤혹스러운 죄의식과 무력감을 겨울햇빛에
실어 보여주는 시다. 화자도 ‘내 쇄골로 겨울밤을 샌’단다.
독자는 얼른 시정(詩情) 넘치는 서두로 돌아가 마음을 녹인다. ‘겨울햇빛 너는/흙 속의
씨앗들을 괜히 깨우지 않는다/가만가만/그 씨앗들이 잠든 지붕을 쓰다듬고 간다.’ 고마운
겨울햇빛, 얼어붙은 대지를 쓰다듬으며 ‘얼지 마 죽지 마 부활할 거야’, 속삭여주네.
[황인숙시인의 행복한 시 읽기]<335>
dongA.com/2014-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