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제 예닐곱 살 적 겨울은
목조 적산가옥 이층 다다미방의
벌거숭이 유리창 깨질 듯 울어대던 외풍 탓으로
한없이 추웠지요, 밤마다 나는 벌벌 떨면서
아버지 가랑이 사이로 발을 밀어 넣고
그 가슴팍에 벌레처럼 파고들어 얼굴을 묻은 채
겨우 잠이 들곤 했지요.
요즈음도 추운 밤이면
곁에서 잠든 아이들 이불깃을 덮어 주며
늘 그런 추억으로 마음이 아프고,
나를 품어 주던 그 가슴이 이제는 한 줌 뼛가루로 삭아
붉은 흙에 자취 없이 뒤섞여 있음을 생각하면
옛날처럼 나는 다시 아버지 곁에 눕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머님,
오늘은 영하의 한강교를 지나면서 문득
나를 품에 안고 추위를 막아 주던
예닐곱 살 적 그 겨울밤의 아버지가
이승의 물로 화신(化身)해 있음을 보았습니다.
품안에 부드럽고 여린 물살을 무사히 흘러
바다로 가라고
꽝 꽝 얼어붙은 잔등으로 혹한을 막으며
하얗게 얼음으로 엎드려 있던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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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익=(1942~)경남 함안 출생.
196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고별>〈편지〉시 당선 등단.
시집<야간 열차><슬픔의 핵(核)><단순한 기쁨><그리고
너를 위하여><아득한 봄><푸른 추억의 빵>
<눈부신 마음으로 사랑했던> 외
한국시인협회상,현대문학상,정지용문학상 등 수상
오늘처럼 추운 겨울날, 한 중년 신사가 한강을 지나고 있었다. 이때 자동차를 타고 있는지,
전철을 타고 있는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그가 무심히 한강을 바라보다가, 커다란
얼음 조각들을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얼음 조각들이 마치 아래의 자잘한
물살들을 품어주는 커다란 등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커다란 등. 그것은 이 중년 신사에게 몹시 익숙한, 그러나 한동안 잊고 있었던 아버지를 불
러왔다. 어린 시절의 그는 외풍이 심한 집에 살았지만 추운 겨울에도 아버지의 체온으로 따
뜻할 수 있었다. 이러한 추억이 떠오르면서, 한강이 순식간에 아버지로 변신하는 부분은 참
놀라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 덕택에 중년의 신사는 오늘의 한강교 위에서 다시금 어린
아이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마법 같은 회상의 순간은 중년 신사의 건조한 일상을 따뜻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예전의
아버지가 아들의 언 발을 녹여 줬던 것처럼 말이다. 부자들만 유산이 있을까. 한강의 아버지
는 가난했지만 아들은 좋은 기억, 훌륭한 유산을 받았다.
나민애 문학평론가[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dongA.com/2016-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