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미널
◈이홍섭◈
젊은 아버지는
어린 자식을 버스 앞에 세워놓고는
어디론가 사라지시곤 했다
강원도 하고도 벽지로 가는 버스는 하루 한 번뿐인데
아버지는 늘 버스가 시동을 걸 때쯤 나타나시곤 했다
늙으신 아버지를 모시고
서울대 병원으로 검진 받으러 가는 길
버스 앞에 아버지를 세워놓고는 어디 가시지 말라고,
꼭 이 자리에 서 계시라고 당부한다
커피 한 잔 마시고, 담배 한 대 피우고
벌써 버스에 오르셨겠지 하고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그 자리에 꼭 서 계신다
어느새 이 짐승 같은 터미널에서
아버지가 가장 어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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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섭=(1965∼)강원도 강릉 출생.
1990년 《현대시세계》를 통해 시인으로, 2000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학평론가로 각각 등단.
시집 <강릉,프라하,함흥> <숨결> <가도 가도 서쪽인
당신><터미널> 산문집 <곱게 싼 인연>등 다수.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시인시각 작품상, 현대불교
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터미널이 ‘여행’의 출발선이라면 좋겠다. 나를 더 멋진 곳으로 데려
다줄 좋은 곳. 이런 터미널만 알고 있다면 당신은 환한 인생을 살아온 셈이다. 하지만 대다수
의 사람들은 살면서 알게 된다. 피곤하고 어두운 터미널과 쓸쓸하고 외로운 터미널 등을 배
우 게 된다. 이홍섭 시인의 시에도 또 다른 인생의 터미널이 등장한다. 그것은 바로 ‘어린 아
버지의 터미널’이다.
시인의 고향은 강원도에 있다. 어린 시인은 가끔 아버지를 따라 타지에 나왔는데, 돌아갈 때
는 버스를 놓칠까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기댈 곳은 아버지뿐인데, 아버지는 한참 자리를 비
우곤 했다. 아버지가 안 오면 어쩌지, 버스가 떠나면 어쩌지, 나는 어쩌지, 이런 생각으로 어
린 시인은 발을 동동 굴렀을 것이다.
다 자란 시인은 또다시 터미널에 오게 되었다. 예전에는 아버지를 따라 왔는데, 이제는 아들
이 아픈 아버지를 모시고 왔다. 버스를 타기 전에 아들은 커피도 마셔야 했고 담배도 피워야
했다. 돌아와 보니, 아버지는 버스 앞에 꼼짝없이 서 있었다.
마치 버스와 아버지를 놓칠까봐 자리를 지키던 어린 자신처럼, 늙은 아버지는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아들이 안 오면 어쩌지, 버스를 놓치면 어쩌지, 나는 어쩌지, 이런 생각으로 힘없
는 아버지는 맘을 졸였을 것이다.
자라 보니, 아버지는 완벽한 사람도 멋진 사람도 아니었다. 잘생기지도, 강하지도, 유명하지
도 않았다. 대단한 아버지를 잃어가면서 우리는 소중한 아버지를 알게 된다. 아마도, 아버지
는 자식에게 나이와 힘을 나누어 주느라 다시 어려졌는가 보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dongA.com/2016-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