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맺힌 꽃눈들은 낮은 온도에서 겨울이라는 한철을 견디고 온도가
오르는 봄이 와야 피어날 수 있다. 이른 봄에 꽃이 먼저 피는 것은 많은 벌과
나비와 곤충들이 아직 지상으로 돌아오지 않은 때이기에 혹여 무성한
이파리에 가려진 꽃이 제 할 일을 온전히 완수할 수 없게 되는 것을 피하게
해주는 유전자의 전략이다. 새나 바람에 의해 결실을 맺는 조매화(鳥媒花)나
풍매화(風媒花)가 많은 봄꽃들이기에 '꽃이 진다고 바람을 탓’하는 투정을
부릴 수만은 없으리라.
자신의 할 일을 끝낸 꽃들은 지는 것이 마땅하다. 꽃 시절이 아무리 좋아도
일 년 삼백육십오일 꽃만 피어있게 된다면, 그 나무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꽃이 져야 연초록 이파리가 돋아나 햇빛과 물과 공기를 버무려 씨앗들을 먹이고,
가지들의 힘을 기르고, 나무둥치에 나이테를 새겨 넣어 나무의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머리 반백인 친구들이 안부를 물어 온다.
겨우내 아프지는 않았는지, 가내 두루 무탈한지, 서로서로 도닥여주며 “문밖
세상 나온 기념으로/사진이나 한 방 찍고 가자”한다. 흰 머리칼, 굽어진 등,
조금 더 줄어든 키, 주름진 손, 지나온 삶의 춥고도 지난했던 시간들이 눈주름
사이에서 눈웃음 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내년에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꽃 멀미처럼 회오리치는 생각 접고 따스한 차나 한 잔 하자고 말하려는데,
“그 순간의 빈틈에/카메라의 셔터가 터지고/나도 터진다/빈몸 터진다”. 지금
여기가 ‘화양연화(花樣年華)’로구나.
문화저널21 편집위원 서대선 시인
[이 아침의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