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ng San Suu Kyi .1945년 6월 19일 출생
만 13년 동안 집안에 갖혀 외부와의 접촉이 엄격히 차단된 생활을 하면서도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서 군사 정권을 긴장하게 만든 여인. 아웅산 수치 여사는 전세계적 관심을 받고 있는 정치범이자 버마 국민들의 정신적 지도자입니다.
현재도 가택연금 상태에 있는 수치 여사는 무력을 앞세워 가혹하게 국민을 탄압하는 군부가 한 여성의 정신적 저항까지 막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지요.
저널리스트인 저스틴 윈틀은 "군부는 수치 여사를 인질로 잡고 있지만, 군부 역시 수치 여사의 인질이 된 상황"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녀를 가두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군부에게 부담이 되고 스스로를 옥죄는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바클라프 하벨 전 체코 대통령은 수치 여사를 '권력 없는 권력(The power of powerless)'이라 표현한 바 있는데요. 사실상 '죄수'의 신분에 불과하지만 20여년간 민주화를 갈망하는 버마 대중의 희망으로 살아왔다는 점에서 정확한 표현이라 여겨집니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정치적 배경을 가진 버마(미얀마)의 군사독재 상황과 비폭력 항거를 주도한 아웅산 수치 여사에 대해서는 국제 정치에 관심이 없는 분들도 한 번쯤은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미얀마'는 1989년 군부가 마음대로 바꾼 국호로 유엔이 인정한 공식적인 국명이긴 하지만, 국민들과 민주화 세력은 고유 국명인 버마를 고집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5.16 쿠데타가 발발한 바로 이듬해인 1962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버마 군정(軍政)은 45년 동안 독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1988년 군부독재에 항의하는 역사적인 민주항쟁이 벌어졌는데요.
88년 8월 8일 8시 8분(이 날을 기려 버마 민주화 투쟁의 상징은 '8888'이라고 합니다), 항만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시작된 시위는 학생, 일반인, 남녀노소를 망라한 국가 전체의 투쟁으로 이어졌습니다. 군부의 무차별 학살로 한달 동안 수천명의 시민이 희생됐다고 합니다.
당시 위독한 어머니를 간호하러 영국에서 귀국했던 아웅산 수치 여사는 시위대에 무차별 발포를 하는 군정의 잔혹성을 목격하면서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게 됩니다.
그녀는 군중을 끌어당기는 명연설과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정치적 지도자로 부상, 민주 세력을 망라한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을 창당하게 됩니다. 군사정권은 1989년 그녀에게 가택연금을 명하며 민주화 세력을 위협했지요.
수치 여사가 갖혀있는 상황에서도 1990년 5월 총선에서 NLD는 485석 가운데 392석을 차지하며 군부에 압승을 거뒀습니다. 그러나, 군사정권은 정권이양은 커녕 선거를 무효화하고 야당 지도자들을 구속, 압재의 강도를 더해 갔습니다.
아웅산 수치 여사의 자택
1991년 그녀는 버마 민주화를 위해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합니다. 군부는 당연히 그녀의 시상식 참여를 불허, 수치 여사의 영국인 남편 마이클 아리스와 두 아들이 대신 수상식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여사의 아들은 수상식장에서 “버마의 민주화 요구는 국제 사회의 평등한 구성원으로 완전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의 투쟁이다. 이는 인간의 정신이 본성적 결함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인류의 멈추지 않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어머니의 뜻을 전했다는군요.
1995년에 가택연금이 일시적으로 해제되었으나, 그녀가 군부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비폭력 민주화 운동을 이어나가자 군부는 2000년 수치 여사를 재연금합니다.
1999년 남편 마이클이 전립선암으로 사망할 무렵에도 그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지요. 마이클은 최후 3년간 아내의 얼굴을 단 한번도 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았다고 합니다.
마이클과 두 아들은 버마 당국에 입국비자 신청을 하였으나 매번 군부에 의해 거절됐습니다. 수치 여사는 사무치도록 남편과 아들을 그리워했지만, 한번 출국하면 다시 입국할 수 없게 될 것이 명백했으므로 떠날 수도 없었다는군요.
남편의 임종 소식을 들은 수치 여사는 이런 말로 심경을 표시했습니다. "그 무엇도 나에게서 그를 빼앗아갈 수는 없다."
이후로도 군부는 그녀에 대한 체포와 구금을 거듭했으며, 2003년 5월 여사를 세 번째로 가택 연금한 이후 6년째 매년 연금 조치를 연장해 오고 있습니다. 올해 5월27일에도 가택연금 기간을 1년 연장, 꼬박 13년을 채우게 됐군요.
어쩌면 그녀는 처음부터 '행복한 개인'보다는 '투쟁하는 공인'으로 살아야 할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아웅산 장군은 국부로 추앙받는 독립영웅이었습니다.
영국의 오랜 식민지였던 버마를 일본의 힘을 빌려 독립시키고 일본이 다시 미얀마를 정복하려 하자 연합군의 힘을 빌려 일본 세력을 몰아내 힘들게 미얀마를 독립국가로 이끈 장본인이었죠.
그런 아버지가 수치 여사의 나이 겨우 두 살일 때 암살을 당합니다. 그녀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남아있지 않았지만, 항상 아웅산 장군의 딸이란 사실을 가슴에 새기며 살아왔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삶을 연구하면서 그의 열정을 이어받아 조국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이지요.
인도대사였던 어머니를 따라 인도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그녀는 1964년 영국 옥스포드대학에 진학합니다. 졸업 후 유엔에서 일하다 남편이 될 마이클 아리스를 만났습니다. 결혼 당시, 그녀는 자신의 미래를 예감이라도 한 듯 남편에게 "내 조국의 국민들이 나를 필요로 하는 날이 오면, 내가 그들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물론, 마이클은 그녀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기를 약속했지요.
두 살의 어린 아웅산 수치.부모, 두 오빠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
평소의 신념대로 조국의 민주화 운동에 뛰어든 수치 여사를 국민적 지도자로 부상시킨 순간은 아마도 1989년 4월 5일 그녀가 선거운동을 위해 이라와디 관구를 방문했을 때였을 겁니다.
군부는 그녀의 선거운동을 방해하기 위해 무장 군인들을 투입했었는데요. 그녀는 총구를 겨눈 군인들을 향해 두려움없이 뚜벅뚜벅 걸어갔습니다. 미소를 띠며 다가오는 그녀의 맑은 눈을 바라본 군인들은 부끄러움을 느끼며 총부리를 내릴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영화 '비욘드 랭군'에서 이 장면을 묘사하기도 했었지요.
사실, 아웅산 수치 여사를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투사'라고 부르기는 힘듭니다. 냉정히 말해 그동안 그녀가 한 일이라곤-압제에 의한 강제 조치이긴 했으나- 집에 갖혀 외국어와 피아노를 배운 것이 다였으니까요.
현실 정치에 전혀 간섭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고, 민주화 투쟁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한 지도 수년이 흘렀습니다.
지난해 8월 유가 인상 항의로 시작된 승려들의 비폭력 가두시위 사태에 대해서도 수치 여사는 아무런 입장 표명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서구 언론이 '샤프란 혁명(Shaffron Revolution)'이라 부른 승려들의 시위는 대규모 민주화 투쟁으로 이어졌으나 결국 유혈진압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한편에서는 "신격화된 아웅산 수치가 오히려 민주화 세력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옵니다. '절대선'으로 인정된 수치 여사는 하나의 상징으로 남았을 뿐, 현실 정치에 변화를 일으킬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이상 그녀만을 바라보며 민주화의 그날을 기다리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지적입니다.
사실, 야당 지도부와 민주화 세력들은 그동안 스스로 어려움을 극복하기 보다는 아웅산 수치 여사의 석방을 요구하며 목을 빼고 그녀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평화'와 '자유'라는 추상적인 메시지만 전달하는 수치 여사보다는 실질적으로 군부와 투쟁할 새로운 지도자를 갈망하는 이들의 주장에는 분명 일리가 있습니다. 한국의 '386세대'에 해당하는 버마의 '88세대'가 사회 중심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보다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투쟁을 갈망하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수치 여사가 상징하는 '굴하지 않는 정신적 항거'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 저널리스트가 지적했듯이 수치 여사의 힘은 '치열한 순수(fierce purity)'에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조국의 민주화에 투신한 한 여인의 순수함. 총칼도, 비난과 협박도 이 순수를 깨뜨릴 수는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몸소 증명해주었습니다.
오는 2010년 버마에서는 총선이 실시될 예정입니다. 국민의 관심은 수치 여사의 출마가 허용될지 여부에 쏠려 있습니다. 그녀가 '상징'이자 '신화'의 굴레에서 벗어나 다시 한번 현실 정치, 현실 투쟁에 뛰어들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
◇ 아웅산 수치 연보
1945년 독립운동가 아웅산 장군의 딸로 출생. 인도와 영국에서 교육을 받음. 1962년 군부쿠데타 발발후 망명생활. 국제단체에서 일하며 공부를 계속함. 1988년 귀국 후 민주화운동 투신, 민주주의민족동맹(NLD) 결성 1989년 1차 가택연금 1990년 연금 상태에서 총선 압승 1991년 노벨 평화상 수상 1995년 연금해제 2000년 2차 가택연금 2002년 연금해제 , 유네스코 인권상 수상 2003년 3차 가택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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