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 명 -서규정-
실연의 신열, 희미해질수록 지워지지 않는 사랑의 그림자와
낙서들이 도란도란 모여 사는 저 축축한 담벼락에 대고
더 이상 보낼 것이 없어야 노래인 줄 알았을 땐
우울은 깊어야 빨리 낫는다,
머리털 감듯 둘둘 말아 햇빛 쨍쨍한 날
세탁기 속에 넣어 영혼도 빨아 털털 털어버릴 수 있다면
곧 교수대에 매달릴 아무리 추한 악당이라도
보고 싶은 사람 하나는 있었다는 듯이
세척, 세척, 세탁소 옆 공터에 긴 목 줄기로 서 있는
해바라기를 타고 느릿느릿 기어올라
치인 칭 감고 도는 나팔꽃처럼
맨 꼭대기에서 입 한번 살짝 맞추고 말라가리라
아니, 투명한 유리잔 속에 나팔 꽃씨로 까마득히 잊혀 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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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규정=전북 완주 삼례 출생
199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황야의 정거장](1992) [하체의 고향](1995)
[직녀에게](1999, 빛남) [겨울 수선화](2004, 고요아침)
[참 잘 익은 무릎](2010, 전망)
제10회 부산작가상 수상 (2010).
〈시작 노트〉
오랜 술래였다, 첫사랑이 두 번도 오고 세 번도 찾아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지막 번째
첫사랑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세탁소 옆 공터에 이발소를 차리고 제 머릴 못 깎는 이
발사가 되고 싶어.
kookje.co.kr/2014-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