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 그늘로부터 잔디
⊙이제니⊙
코끼리는 간다
들판을 지나 늪지대를 건너
왔던 곳을 향해 줄줄이 줄을 지어
가만가만 가다 보면 잔디도 밟겠지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가
발아래 잔디도 그늘이 되겠지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속으로 속으로 혼잣말을 하면서
나아갔다가 되돌아갔다가
코끼리는 간다
이철원/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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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니=(1972~)부산에서 출생.
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
〈페루〉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창비, 2010)가 있음.
코끼리는 육중하다. 육중한 코끼리가 저벅저벅 간다. 탁 트이고 활발한 들판을, 우울한
늪지대를. 미지의 곳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최초의 곳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어쨌든 코
끼리는 간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 속을 혹은 빛의 분수가 솟구치는 정오를 코끼리
는 간다.
코끼리는 참 꾸준히 간다. 미안하게 생각할 때에도, 괜찮다고 생각할 때에도. 그처럼
감정이 내리고 혹은 오르더라도. 코끼리는 진행한다. 코끼리의 마음도 진행한다. 그러
고 보면 진행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육중한 몸집으로 모두 다 진행하고 있지만 그 기미를, 그 희미한 암시와 흐릿한 리듬
을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다. 보라, 11월의 나무들도 코끼리처럼 간다. 나목(裸
木)을 지나 한기(寒氣)를 건너러.
문태준 시인 |
Chosun.com/2014.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