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동 시외버스터미널
초라한 남녀는
술 취해 비 맞고 섰구나
여자가 남자 팔에 기대 노래하는데
비에 젖은 세간의 노래여
모든 악기는 자신의 불우를 다해
노래하는 것
이곳에서 차를 타면
일금 이천 원으로 당도할 수 있는 왕릉은 있다네
왕릉 어느 한 켠에 그래, 저 초라를 벗은
젖은 알몸들이
김이 무럭무럭 나도록 엉겨 붙어 무너지다가
문득 불쌍한 눈으로 서로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
굴곡진 몸의 능선이 마음의 능선이 되어
왕릉 너머 어디 먼데를 먼저 가서
그림처럼 앉아 있지 않겠는가
결국 악기여
모든 노래하는 것들은 불우하고
또 좀 불우해서
불우의 지복을 누릴 터
끝내 희망은 먼 새처럼 꾸벅이며
어디 먼데를 먼저 가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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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1964~ )경남 진주 출생.
1987년 경상대 국문과 졸업
『실천문학』에 [땡볕]등 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1988년 첫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간행.
1992년 두 번째 시집 『혼자 가는 먼 집』간행.
2001년 세 번째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간행.
희미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비에 젖은 초라한 남녀가 서로의 몸에 기대어 부르는
노래. ‘초라’를 벗은 몸으로 서로 엉겨 붙어 무너지다가 문득 서로의 뒷모습을 바라
볼 때, 이미 그들은 사랑을 연주하는 악기. 모든 노래하는 것들은 불우하고 또 불우
해서, 불우 속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우리의 불우를
다해 저 먼 곳으로 향하는 희망을 노래하는 악기.
<황병승·시인>
joins.com/2014.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