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으로 가는 길
◇정호승◇
내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낯선 새 한 마리 길 끝으로 사라지고
길가에 핀 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내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슬픔으로 걸어가는 들길을 걸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하나 슬픔을 앞세우고
내 앞을 지나가고
어디선가 갈나무 지는 잎새 하나
슬픔을 버리고 나를 따른다.
내 진실로 슬픔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으로
끝없이 걸어가다 뒤돌아보면
인생을 내려놓고
사람들이 저녁놀에 파묻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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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그의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에 실려 있는 대표작으로, 한 시대를 살아
가는 시인의 운명을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화자인 '나'로 대치된 시인은 '내 진실
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서 있다.
그는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세상 속으로 고단한 길을 떠난다.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
에서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 다시 '진실로 슬픔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으로 심화되는 과정을 통해 그가 그토록 기다리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슬픈 것
들이 진정한 아름다움으로 빛나게 될 때이다.
이처럼 슬픔에서 아름다움을 읽어내는 시인의 밝은 눈은 자신의 '인생을 내려놓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삶에 대한 깊은 공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거기에다 '슬픔',
'기다림', '아름다움'이 저녁 들길의 아름다운 풍경과 어우러져 빚어내는 고즈넉하고
쓸쓸함의 정서는 이 시를 더욱 아름다운 작품으로 만드는 원동력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