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든 이승의 한 갈래 길에서 어머니는 그의 팔을 잡게 되고
나도 그냥 그의 한쪽 팔을 잡고 동행이 되었습니다
나는 그를 시원하게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도 어색하긴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서른 해를 한참씩 딴 길을 가다간 다시 합류하고
딴 길을 가다간 합류하다가 그는 여든다섯에 이승을 떠나고
어머니도 그로부터 열두 해를 더 보내고 예순아홉에 떠났습니다
지금 호젓이 그와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그들과 동행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다만
그의 이름을 되새겨 보고 있습니다 나와 동행이어서
그의 발걸음이 허둥거리지 않았기를 바라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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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하룡(1940∼ )일본 출생,
구미, 창원, 부산 등지에서 성장
1964년 시동인지 <잉여촌> 창간동인으로 활동,
1975년 시집 ‘모향(母鄕)’으로 등단
시집 ‘잡초의 생각으로도’, ‘별향’ 등
경남문인협회, 경남아동학회 이사
한 가족의 서사가 담긴 자전적 시다. 시인과 쉰 살 차이가 난다니 ‘그’는 1890년생이며
‘여든다섯에 이승을’ 떠났다는 해는 1975년일 테다. 그들이 ‘동행’한 세월이 ‘서른 해’,
인연이 시작된 1945년에 시인은 만 다섯 살이다. 어린 아들이 딸린 젊은 여인이 자기
보다 서른 살 가깝게 많은 남자의 ‘팔을 잡게’ 되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의 삶에 곡절이
없을 수 없다. 종종 곡절의 요인이었을 아들, 시인은 ‘그’와 ‘한참씩 딴 길을 가다간 다시
합류하고 딴 길을 가다간 합류’했단다.
‘장화홍련’이나 ‘콩쥐팥쥐’ 같은 이야기는 제 피가 섞이지 않은 자식에 대한 무정함과 미
움이 사람에게는 있게 마련이라는 편견을 굳히고 그에 대한 공포를 증폭시킨다. 하지만
당최 곁을 주지 않거나 못되게 굴어서 계모나 계부를 외롭고 괴롭게 만드는 자식도 드물
지 않다. 시인은 대놓고 삐뚤어진 행태를 보이지는 않았겠지만 ‘그’와 끝내 친해지지는
못한 듯하다. 아이들은 제 부모가 나이가 너무 많으면 부끄럽게 여긴다.
하물며 할아버지 나이인 그는 친아버지도 아닌데 젊은 어머니의 남편이다. 어린 시인은
이 관계들이 마뜩지 않고 ‘그’를 대하기 어색하기만 했단다. 늘 데면데면한 손자뻘 의붓
자식과의 ‘동행’이 ‘그’도 녹록지 않았을 것이다. 먼 옛날에서 살뜰한 추억도 없이 한숨과
함께 떠오르는 이름, ‘김경윤’. ‘나는 그를 시원하게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습니다’. 시인은
‘지금 호젓이 그와 어머니를 생각 ’하면서 세월과 인연의 아득한 물살에 휩쓸린다.
[황인숙시인의 행복한 시 읽기]<399>
dongA.com/2015-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