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박소란-
담장 저편 희부연 밥 냄새가 솟구치는 저녁
아아,
몸의 어느 동굴에서 기어나오는 한줄기 신음
과일가게에서 사과 몇 알을 집어들고
얼마예요 묻는다는 게 그만
아파요 중얼거리는 나는 엄살이 심하군요
단골 치과에선 종종 야단을 맞고 천진을 가장한 표정으로
송곳니는 자꾸만 뾰족해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아직
아침이면 무심코 출근을 하고
한 달에 한두 번 누군가를 찾아 밤을 보내고
그러면서도 수시로 아아,
입을 틀어막는 일이란
남몰래 동굴 속 한 마리 이름 모를 짐승을 기르는 일이란
조금 외로운 것일지도 모른다고
언젠가 동물도감 흐릿한 주석에 밑줄을 긋던 기억
아니요 말한다는 게 또다시 아파요
나는 아파요
신경쇠약의 달은 일그러진 얼굴을 좀체 감추지 못하고
집이 숨어든 골목은 캄캄해 어김없이 주린 짐승이 뒤를 따르고
아아,
간신히 사과 몇 알을 산다 붉은 살 곳곳에 멍이 든 사과
짐승은 허겁지겁 생육을 씹어 삼키고는 번득이는 눈으로
나를 본다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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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란=(1981∼ ) 서울 출생.
●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 2009년 《문학수첩》으로 등단.
길을 가다가 마주 걸어오던 청년에게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여장남자 같아.” 같이 찧고
까불던 그의 일행이 일순 조용해지며 아무도 웃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나를 두고 한 말이
분명했다. 그런가? 늙고 살이 찐 뒤 바그너같이 생겨진 것도 같다.
이제 지나가던 젊은 남자가 친구들 웃기자고 함부로 대할 만큼 늙은 여자가 된 것인가. 늙
은 것은 서럽지만, 서러운 젊음도 있다. 박소란의 시를 읽노라면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은
내 청춘의 가슴 저린 시간들이 떠오른다.
화자는 활달하고 낙천적인 사람이 아니고, 환경도 밝지 않은 듯하다. ‘수시로 아아,’ ‘한 줄
기 신음’인지 한숨인지 ‘몸의 어느 동굴에서 기어나온’단다. 절망감과 외로움이 목구멍까
지 차올라 있는 것이다. ‘아침이면 무심코 출근하는 직장’은 호구지책일 뿐 아무 즐거움이
없는 곳, 거의 매일 곧바로 퇴근해서 돌아가는 집도 ‘캄캄’하다.
저녁의 긴 그림자를 밟고 집에 들어가는 길에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내는, 박소란이 그
리는 필경 가난하고 외로운 청춘의 초상에 젊은 여성 독자는 더 깊이 공감할 것이다. 그의
시를 하나 더 소개한다. ‘내 집은 왜 종점에 있나//늘//안간힘으로/바퀴를 굴려야 겨우 가
닿는 꼭대기//그러니 모두/내게서 서둘러 하차하고 만 게 아닌가’(‘주소’).
[황인숙시인의 행복한 시 읽기]<417>
dongA.com/2015-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