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을 보여주다
◆이정주◆
낮잠 속으로 영감이 들어왔다.
영감은 아래턱으로 허술한 틀니를 자꾸 깨물었다.
노파가 따라 들어왔다. 나는 이불을 개켰다.
아, 괜찮아. 잠시 구경만 하고 갈 거야.
나는 손빗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골랐다.
책이 많네. 공부하는 양반이우.
나는 아무 말 않고 서 있었다.
책들을 버려야지. 불태워 버려야지.
내 얼굴에 불길이 확 치솟았다.
싱크대에 그릇들이 넘쳐나 있었다.
혼자 자취하는 모양이네. 우리 딸도 혼자 살아요.
그러나 걔는 짐이 이렇게 많지 않아.
짐들도 버려야지. 모두 갖다 버려야지.
나는 양손을 비비며 서 있었다.
햇볕도 잘 들고 혼자 살기 딱 알맞네.
노파는 화장실 문을 열었다가 닫았다.
아, 그럼. 도시가스 들어오고 방도 따뜻하대요.
영감은 신발을 꿰며 소리쳤다.
노파는 내 얼굴을 빠안히 쳐다보며 말했다.
왜 나갈려고 그러시오? 나는 한참 눈을 껌벅거렸다.
그리고 손날로 허공을 찌르며 말했다.
먼 데로 가려고 합니다.
먼 데로? 노파의 눈이 내 손끝을 따라왔다.
노파도 같이 가고 싶은 얼굴이었다.
갑자기 현관이 멀어지고 나도 뒤로 엄청 물러나 있었다.
노파는 화장실 앞에서 갑자기
아득해진 공간을 쳐다보고 서 있었다.
멀리 현관 밖에서 영감이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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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주=(1953∼ )경남 김해 출생.
부산대학교 약학대학 약학과 졸업.
1982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행복한 그림자><의심하고 있구나>
<문밖에 계시는 아버지><홍등>이 있음.
화자의 사는 모양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여기저기 쌓이고 흩어져 있는 책들, 싱크대에
넘쳐나는 그릇들, 방바닥 한가득 펼쳐진 이부자리, 혼곤한 낮잠. 여기 불쑥 낯선 이들이 들
어선다. 낯선 이들이 구석구석 살핀다.
변기도 당연히 들여다보고, 그 결에 뭉쳐 놨거나 널어놓은 속옷까지 보리라. 단칸방에 살다
가 이사를 하자면 구차스러운 이 과정을 감수해야 한다. 방이나 보고 얼른 나갈 것이지, 할
머니는 따님이 살게 될지 모를 방의 현재 거주자한테 궁금한 게 많으시다.
왜 나가려고 그러시오? 뚱하니 입 다물고 있던 화자도 이에는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도시
가스 들어오고 따뜻한, 햇볕 잘 들고 혼자 살기 딱 알맞은 방. 여기도 누군가에게는 ‘먼 데’
이리라.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013>
dongA.com/2012-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