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헌-가을비 우산속에
실없이 가을을
◆나해철◆
밥집 마당까지 내려온 가을을
갑자기 맞닥뜨리고
빌딩으로 돌아와서
일하다가
먼 친구에게 큰 숨 한 번
내쉬듯 전화한다
참으로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나눈다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도
나눌 수 있다니
좋다고
불현듯 생각한다
가을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도
와 있어서
그를 그렇게라도 보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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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철=(1956∼ ) 전남 나주 출생 전남대 대학원 졸업
시인이자 성형외과 원장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산포 1> 당선 등단 시집 <무등에 올라><동해일기>
<그대를 부르는 순간 꽃이 되는><아름다운 손><긴 사랑>외
화자는 도시 직장인이다. 일터가 빌딩에 있고, 근무 중에 친구에게 전화 걸어 잡담을 나눌
수 있는 정도 지위는 된다. 오늘을 향해 매진하며 성실히 살아왔을 것이다.
시에 ‘아무것도 아닌’이 세 번 나온다. ‘아무것도 아닌’의 반대말은 ‘가치 있는’일 것이다.
예컨대 능력, 매력, 쓸모, 근면, 이익, 부귀, 영화, 명성, 권력 등등의. 뭇사람이 이 말들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획득하려 애쓰는 건 다행한 일이다. 그 지향과 노력으로 이 세상이
무사히, 믿음직스럽게 굴러가는 것일 테다.
그런데 쓸쓸하고 가슴이 허전할 때, 우리의 마음은 왜 ‘아무것도 아닌 것’에 기우는 것일
까? ‘아무것도 아닌 것에도/와 있’는 가을한테 들어보자.
화자가 친구와 나눈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는 필경 유쾌하거나, 은근하고 다정했을 테다.
‘참으로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침울하고 암담하게 나누고 있을 사람은,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매우 드물 것이다.
[황인숙시인의 행복한 시 읽기]<011>
dongA.com/2012-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