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발의 사랑
◆허영자◆
분홍으로는 못 가는 길 초록으로도 못 가는 길
번갯불 천둥으로는 더더욱 못 가는 길
수정(水晶)의 투명함만으로 그대에게 이릅니다.
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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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자(1938~ ) 경남 함양 출생
1962년 <현대문학>지에 박목월 선생 추천으로
“도정연가” “연가 3수” “사모곡”으로 등단
시집 <가슴엔 듯 눈엔 듯> <친전><얼음과 불꽃>외 다수
시조집; <소멸의 기쁨> 산문집; <한 송이 꽃도 당신 뜻으로>
<허영자 선수필집>외 다수 한국시인협회상, 월탄문학상,
편운문학상, 민족문학상, 펜문학상, 목월문학상 등 수상
은발의 시절. 억새며 갈대가 한껏 피어 산하를 뒤덮을 때면 은발의 세상을 이룬다. 빛깔로
치면 갈대보다 훨씬 곱고 선명한 은빛의 억새. 그런 억새들이 논밭두렁이며 산등성이 할
것 없이 이루는 은발 천지는 또 다른 장관이다.
도심에도 은발이 늘고 있다. 염색하지 않는 흰 머리 노년이 늘며 또 다른 은발의 당당한 풍
경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분홍으로는 못 가는 길'이고 '초록으로도 못 가는 길'이다. 물
론 '번갯불 천둥으로는 더더욱 못 가는 길'이 틀림없다. 무수한 '분홍'과 '초록'과 '번개'와 '천
둥'까지 이르는 연륜을 다 보내고 나서야 허여되는 시간의 관(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의 '수정(水晶)' 훈장 같은 것 아닐까.
그 수정의 투명함만으로 그대에게 이른다는 겸허한 수용에서 은발은 더 빛난다. 낙엽 속에
서 은발이 깊이 돌아뵈는 것은 저무는 철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여성 시인의 은발, 그
눈부신 관 앞에 햇빛도 잠시 시린 듯하다.
정수자 시조시인[가슴으로 읽는 시조]
Chosun.com/2015.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