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많이 망가졌다는 것을
갑자기 알아차리게 된 이즈음
외롭고 슬프고 어두웠다
나는 헌것이 되었구나
찢어지고 더러워졌구나
부끄러움과 초라함의 나날
모래밭에 나와 앉아 모래장난을 했다
손가락으로 모래를 뿌리며 흘러내리게 했다
쓰라림 수그러들지 않았다
모래는 흘러내리고 흘러내리고
모래 흘리던 손 저절로 가슴에 얹어지고
머리는 모랫바닥에 푹 박히고
비는 것처럼
비는 것처럼
헌것의 구부린 잔등이 되어 기다리었다
모래알들이 말했다
지푸라기가 말했다
모든 망가지는 것들은 처음엔 다 새것이었다
영광이 있었다
영광, 영광
새것인 나 아니었더라면
누가 망가지는 일을 맡아 해낼 것인가
망가지는 것이란 언제고 변하고 있는 새것이라는 말
영광, 영광
나는 모래알을 먹었다
나는 지푸라기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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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명=(1955~ )서울에서 출생
1990년 계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단 한 사람』『세워진 사람』 등이 있다
제4회 일연문학상과 제2회 서정시학작품상을 수상
화자의 외롭고 슬프고 어두운 마음 상태를 세세히 그린 시다. 언제부턴가 자신이 아무 쓸모
없고 볼품없는 ‘헌것’이 돼 버렸다고 생각하게 된 화자는 망연히 발길을 옮기다 동네 놀이터
의 모래밭에 들어가 쪼그려 앉는다.
서 있을 기운도 없었겠지만, 문득 그 자리에서 머리를 길바닥에라도 처박고 가슴을 쥐어뜯
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힘들었을 것이다. 마침 모래밭이어서 다행이다. ‘모래는 흘러내리고
흘러내리고’. 손가락 새로 흘러내리는, 마치 시간의 입자 같은 모래알들의 하염없는 감촉이,
아마도 시간에 상처 입은 화자의 마음을 쓰다듬어 줬으리라.
[황인숙시인의 행복한 시 읽기]<021>
dongA.com/2012-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