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1959년 겨울
◆서정춘◆
어리고, 배고픈 자식이 고향을 떴다
아가, 애비 말 잊지 마라
가서 배불리 먹고 사는 곳
그곳이 고향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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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춘=(1941~ ) 전남 순천 출생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2001년 박용래문학상, 2007년 유심작품상 수상
-시집 [죽편][물방울은 즐겁다].....
지하철 1호선 서울역에서 전철을 기다리고 있다면, 누구든 이 시를 만날 수 있다. 서정춘
시인의 이 작품은 그곳 스크린도어에 적혀 있다. 그런데 누가 서울역에 이 시를 배정했는
지 몰라도 그 감각은 정말이지 놀랍다고 할 수 있다. 서울역에서 읽게 되는 시 ‘30년 전’이
라니. 기차에서 막 빠져나온, 지친 심신이 읽는 ‘30년 전’이라니. 집에서 편히 앉아 읽을 때
와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서울역과 이 시의 조합은 잔잔하던 마음마저 요동치게 만든다.
시인은 1941년에 태어났는데, 이 시의 부제는 ‘1959년 겨울’이라고 되어 있다. 계산해 보
면 1959년의 시인은 열아홉 살이다. 그리고 마치 열아홉이란 고향을 떠나기 위한 나이인
것처럼, 고향을 떠나왔겠다. 그는 “어리고, 배고픈 자식”이었고, 아버지는 많은 돈을 쥐여
줄 수가 없었다.
돈 대신 걱정을, 돈 대신 마음을, 돈 대신 기원을 줄 수밖에 없었던 시인의 아버지는 아들
에게 배부른 곳이 고향이라는 말을 해주었다. 가난한 고향을 돌아보지 말고, 그리워하지
도 말고, 너 배불리 잘살라는 말씀이다. 자식이 어디 가서 배곯지나 않았으면 좋겠다는 아
버지의 바람이 참 절절하다.
이후 아버지의 말을 입에 물고 시인은 살아 왔다. 얼마나? 이후 30년이나. 시의 제목 ‘30
년 전’이 1959년을 의미하니까 이 시가 창작된 시점을 추측하자면 1989년, 시인의 나이
쉰을 바라보고 있을 즈음이다. 그렇게 아버지의 당부는 열아홉 살 청년을 중년이 되도록
지탱해 주었다. 그뿐일까. 아마도 칠순을 넘긴 지금에도 시인은 당부하던 아버지의 얼굴, 목
소리, 분위기를 잊지 않고 있을 것이다.
명절 연휴가 시작되면 서울역은 어느 때보다 붐빌 것이다. 그 붐비는 사람들 사이에서 저
시가 묻는다. ‘나는 고향이 있는가.’ 귀향기차를 탈 모든 사람에게는 물론 고향이 있다. 그
런데 시가 묻는 것은 출신 지역이 아니다. ‘나는 나를 살게 하는 목소리가 있는가.’ 이 짧은
시가 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 목소리를 보러 가는 명절이 되면 좋겠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dongA.com/2016-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