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김기림◆
나의 소년 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 )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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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림=(金起林,1908~?)본명은 인손(仁孫). 함북 출생.
1930년에 조선일보를 통해 문단에 등단, 1933년 <구인회>
회원. 시집으로는 <기상도>, <바다와 나비>등이 있고 그밖에
다수의 평론과 소설이 있다.
시인 김기림은 과수원집 아들이었다. ‘무곡원’이라는 이름의 과수원집에는 여섯 명의 딸과
한 명의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중에서 유일한 아들이자 막둥이가 김기림이었던 것이다. 이
런 상황을 보면 1910년대 함경북도 학성군, 지금 지명으로는 김책시의 한 집안에서 김기림
이 얼마나 사랑받고 컸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그의 유년은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
았다. 그 이유가 이 시 같은 수필, 수필 같은 시에 잘 나와 있다.
어린 시절, 김기림은 어머니와 누이를 잃었다. 어머니의 상여는 언덕길을 돌아 사라졌는데
처음에 어린 아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그리고 몰랐기 때문에 기다렸다. 하
지만 와야 할 사람은 오지 않고 대신 다른 것들만 돌아왔다. 노을에 젖은 빈 마음이 돌아왔
고,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만 열심히 돌아왔다.
어린 아들은 언젠가 어머니가 갔던 길로 내려와 제 뺨을 쓰다듬어 줄 것이라 기대했다. 그렇
지만 아들의 뺨을 어루만지는 것은 어둠뿐이었다. 결국 이 아들은 자라서 어떻게 했을까. 그
가 언덕에서 만난 모든 의미들은 결코 답안지를 채워주지 못했는데 말이다. 길을 따라 떠날
수 있을 나이가 되자마자 떠났을 것이 당연해 보인다. 스스로 어떤 답을 찾기 위해서는 떠나
야 한다.
떠나는 그의 가슴에는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라는 보퉁이가 안겨 있었다. 그리고 이 보퉁이
가, 기억이, 어머니가 어린 과수원집 아들을 시인 김기림으로 만들었다. 이 시가 반짝거리는
이유는 한 시인의 탄생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역시나 탄생이란 참 아름다운 것이다. 그
리고, 아픔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나민애 문학평론가[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dongA.com/2016-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