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날
◈윤제림◈
소리 없이 쏟아지는 저 햇살
그대로 법일 수 있다면 좋겠네
꽃망울 터지는 소리에도 눈물 터지게 하는
얼음장 풀리는 소리만으로 응어리 풀리게 하는
아내의 야윈 뺨에도 화색이 돌게 하는
딸애의 흰 낯에도 푸르름이 비치게 하는
기척도 없이 다가드는 저 환한 햇살 그대로
온전한 법일 수 있다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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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1960~ ) 충북 제천 출생. 인천에서 성장
1987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뿌리 깊은 별들을 위하여'
외 9편이 당선되어 등단. 동국대학교 국문과 졸업
시집 <삼천리호 자전거>(1988), <미미의 집>(1990),
<황천반점>(1994) 사랑을 놓치다 등 21세기 전망 동인
사람에게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오감(五感)이 있다. 이 오감이란 몸의 신호이고 또
언어다. 몸에 감각을 받아들이는 특정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중
에서도 시각은 가장 직접적이고, 촉각은 가장 은밀하며, 후각은 가장 암시적이다.
이들은 비슷하면서도 퍽 달라 마치 몸이라는 한집에 사는, 서로 다른 다섯 형제와도 같다. 평
소 이 다섯 형제는 제각기 놀다가도 무슨 큰 변화가 닥치면 다 같이 모여들어 한목소리를 낸
다. 예를 들어 요즘 같은 때, 다섯 개의 감각은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봄이 온다”고 말이다.
아직 겨울옷을 벗지 못했대도 감각의 말은 맞다. 바람의 냄새가 달라졌고, 햇빛의 자극이 달
라졌고, 풍경의 얼굴이 달라졌다. 밥상에는 나물이 오르고, 얼음 녹아 개울이 흐른다. 3월이
되니 응당 와야 할 봄이 온 것일 텐데, 내가 오라고 해서 온 것은 아닐 텐데, 이유 없이 봄이
반갑다.
그런데 봄이 온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봄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 아픈 사람 낫
게 해주지 못하고, 없는 연봉 만들어 주지도 못하고, 간 사람을 돌려주지도 못한다. 그럼에
도 이 무능한 봄은 서럽게도 반갑다.
생각건대 봄은 위대하고 거대한 자연신의 옷자락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해주지
않지만 아무것이든 해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신의 얼굴을 하고 봄은 온 사방천지에서 찾아
온다. 그래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해도 일말의 기대를 해보게 된다. 마치 이 시처럼.
시인에게 봄은 영 무능한 것이 아니다. 봄은 아내의 뺨과 딸의 낯이 더 건강하게 바뀔 것이
란 상상을 하게 해 준다. 사람들은 이것을 희망이라고 부른다. 뻔한 말이라도 좋다. 봄은 희
망을 몰고 온다. 간절하게, 믿어 보고 싶다.
나민애 시인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dongA.com/2016-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