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8. 24. 07:16ㆍ◈읽고싶은詩
노거수老巨樹 ◈박노해◈ 나는 이제 속도 없다 빛나는 나이테도 없다 안팎을 들락이는 바람 소리뿐 어느 하루 나 쓰러진다고 기뻐하지 마라 얼마나 많은 해와 달이 여기 등 기대앉은 사람들의 한숨과 이야기들이 나와 함께 사라지는 것이냐 어느 하루 나 쓰러진다고 슬퍼하지 마라 이 한 몸 사라진 텅 빈 자리에 시원한 하늘이 활짝 트이고 환한 여백이 열리지 않느냐 온몸으로 지켜온 내 빈자리에 이슬이 내리고 햇살이 내리고 새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이 걸어올 것이니 -------------------------------------------------------------- ▶박노해=1957년 전라남도 함평군에서 출생 1984년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을 펴내 ‘얼굴 없는 시인’으로 알려졌다. 100만 부 가까이 발간된 《노동의 새벽》은 당시 ‘잊혀진 계급’이던 천만 노동자의 목소리가 되었고, 젊은 대학생 들을 노동현장으로 뛰어들게 하면서 한국사회와 문단을 충격으로 뒤흔들었다. 1991년 3월 구속 후 24일간 잔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국가보안법상 소위 ‘반국가단체 수괴’ 죄목으로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93년 두 번째 시집《참된 시작》, 1997년 옥중 에세이집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펴냈다. 수백 년 살아온 노거수의 가슴이 텅 비었구나. 평생 쓴 나이테 자서전을 바람의 도서관에 기 증하였구나. 항상 높은 곳을 연모하였으나 이제 낮은 곳에 다다를 준비가 되었구나. 가지를 떠돌이새들의 게스트하우스로 내어주고, 열매로 무상급식 일삼더니 제 몸을 통째로 땅의 제 단에 내놓을 참이구나. 어느 하루 당신이 쓰러지면 슬퍼하겠다.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 이므로. 어느 하루 당신이 쓰러지면 기뻐하겠다. 또 하나의 세계가 탄생하는 것이므로. <시인 반칠환>[시로 여는 수요일] hankooki.com/2016-08-23
노거수老巨樹
◈박노해◈
나는 이제 속도 없다 빛나는 나이테도 없다 안팎을 들락이는 바람 소리뿐 어느 하루 나 쓰러진다고 기뻐하지 마라 얼마나 많은 해와 달이 여기 등 기대앉은 사람들의 한숨과 이야기들이 나와 함께 사라지는 것이냐
어느 하루 나 쓰러진다고 슬퍼하지 마라 이 한 몸 사라진 텅 빈 자리에 시원한 하늘이 활짝 트이고 환한 여백이 열리지 않느냐 온몸으로 지켜온 내 빈자리에 이슬이 내리고 햇살이 내리고 새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이 걸어올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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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1957년 전라남도 함평군에서 출생 1984년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을 펴내 ‘얼굴 없는 시인’으로 알려졌다. 100만 부 가까이 발간된 《노동의 새벽》은 당시 ‘잊혀진 계급’이던 천만 노동자의 목소리가 되었고, 젊은 대학생
들을 노동현장으로 뛰어들게 하면서 한국사회와 문단을 충격으로
뒤흔들었다. 1991년 3월 구속 후 24일간 잔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국가보안법상 소위 ‘반국가단체 수괴’ 죄목으로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93년 두 번째 시집《참된 시작》,
1997년 옥중 에세이집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펴냈다.
수백 년 살아온 노거수의 가슴이 텅 비었구나. 평생 쓴 나이테 자서전을 바람의 도서관에 기
증하였구나. 항상 높은 곳을 연모하였으나 이제 낮은 곳에 다다를 준비가 되었구나. 가지를
떠돌이새들의 게스트하우스로 내어주고, 열매로 무상급식 일삼더니 제 몸을 통째로 땅의 제
단에 내놓을 참이구나. 어느 하루 당신이 쓰러지면 슬퍼하겠다.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
이므로. 어느 하루 당신이 쓰러지면 기뻐하겠다. 또 하나의 세계가 탄생하는 것이므로.
<시인 반칠환>[시로 여는 수요일] hankooki.com/2016-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