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 한 알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 있어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저게 혼자서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
▶장석주=(1955~ )충남 논산 출생
1975 ≪월간문학≫ 시부문 신인상에 <심야>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햇빛사냥><완전주의자의 꿈><그리운 나라>
<어둠에 비친다><새들은 황혼 속에 집을 짓는다>
<어떤 길에 관한 기억><크고 헐렁한 바지>
좋은 시인이 지닌 몇 가지 덕목이 있다. 그중의 하나는 ‘관찰 잘하기’이다. 어린아이와 같이
반짝이는 눈을 가지고, 세상 만물을 당연하지 않게 보라. 이것이 시를 쓰는 출발점이다. 그
런데 흔한 것을 새롭게 보라니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대추 한 알’이라는 시를 읽어 보
면 대번에 짐작할 수 있다. 작은 대추 한 알로 꽉 채워져 있는 이 시는 대추를 잘 관찰해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원래 대추는 비싸고 귀한 과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 시를 읽고 나면 생각이 바뀐다. 비싼
것이 대수일까. 그와 상관없이 분명 대추는 귀하고 장한 과일임에 틀림없다. 시인은 그 증거
들을 조목조목 찾아냈다. 대추는 지금 한창 익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익는 것이란 얼마나
장한 일이냐. 태풍, 천둥, 벼락, 번개를 대추는 비명 하나 없이 견디어 냈다. 고생을 견딘 대
추는 붉게 익을 수 있었다.
대추의 모양이 점점 둥글어 가는 것 또한 몹시 장한 일이다. 누가 재촉한 것도 아닌데 대추
는 저 혼자 열심히 크고 있다. 무서리와 땡볕과 초승달을 꿀꺽꿀꺽 먹고 대추는 둥실둥실
자라났던 것이다. 고맙고 기특한 일이다. 시인은 감탄과 경외감을 담아 대추에게 말을 건넨
다. 너는 대단하구나, 너는 세상을 잘 살아냈구나.
이쯤 되면 이 시가 대추에서 시작하지만 대추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세상
의 쓴 것과 단 것을 제 안에 품고 자라나는 모든 존재는 훌륭하다. 엄마가 일해도 무럭무럭
자라주는 아이는 벌써 훌륭하다. 취업하려고 애쓰면서 자책하는 젊은이는 이미 훌륭하다. 많
은 것을 잃어가며 세상을 알아가는 어른들 역시 훌륭하다. 천둥 같은 시련에 붉어진 얼굴과,
땡볕을 두려워하지 않는 어깨는 훌륭하다. 믿지 못하겠거든 대추를 바라볼 일이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dongA.com/2016-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