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추억
◈허수경◈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썩었는가 사랑아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환하고 아프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은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세월 속에 다시 아플 때
몸 얻지 못한 마음의 입술이
어느 풀잎자리를 더듬으며
말 얻지 못한 꿈을 더듬으리라
-허수경作 <공터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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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1964~ )경남 진주 출생.
1987년 경상대 국문과 졸업
『실천문학』에 [땡볕]등 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1988년 첫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간행.
1992년 두 번째 시집 『혼자 가는 먼 집』간행.
2001년 세 번째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간행.
■세월을 누가 이길 수 있으랴. 영원하리라 믿었던 사랑도 세월 앞에선 각주에 불과하다.
사랑이 떠난 자리에는 늙은 상처가 남는다. 굳은살처럼 남아 있는 흔적. 시인은 그 상처를
두고 '환하고 아프다'고 표현한다.
비록 지나가버렸지만 사랑했었으므로 상처는 아프지만 환하다.그게 인생이고 그게 사랑
이니까. 때로는 현재진행형의 사랑보다 남겨진 상처가 더 아름답게 다가올 때가 있다. 추
억의 힘이다.
진정한 사랑을 해본 사람은 안다. 사랑은 추억을 남겨두기에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아픈 추억을 아프다고 말하지 않을 때, 그 추억을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일 때, 상처마저도
환해질 수 있다.
[허연 문화전문기자·시인] [시가 있는 월요일]
mk.co.kr/2016.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