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숫물도 목욕물도
신과 짐승과 사람이 함께 쓰더군
물건 참 오래 쓰고 곱게 쓰더군
만년(萬年) 묵은 눈이
아직도
새것이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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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1960년 1월 21일 생, 충북 제천시
1987년 문예중앙 시 '뿌리 깊은 별들을 위하여'
주요 시집 :『삼천리호 자전거』,『미미의 집』,『황천반점』
눈 덮인 이국(異國)의 준봉(峻峰)을 오르는 행렬이 있다. 고도가 높아 하늘에 일층
가깝다. 문명과 이익을 짜게 재는 시장과는 일층 더 멀어졌다. 자고 먹고 사고파는
물품이 모두 천산물이다. 눈 녹은, 맑은 찬물로 신(神)도 짐승도 사람도 목을 축이고
몸을 씻는다. 한 바가지의 물도 공공의 물건이자 대자연의 선물. 여인들은 밥을 짓고
빨래를 처덕이겠지. 물뿐이겠는가. 우주가 하나의 큰 꽃인 것을.
설산 마을에서는 내키는 대로 엄벙덤벙 마구 쓰지 않으니 오래되어도 너절하거나 헐지
않았다. '만년(萬年) 묵은 눈'이 '새것'처럼 여전히 깨끗하고 빛나는 순백의 숫눈이다.
엄동에 설산처럼 인류가 흰 이마 위에 이고 지녀야 할 고고(孤高)하고 신성한 정신을
생각해 보노라니 오늘 이 아침이 문득 새롭고 산뜻하다.
문태준 / 시인
Chosun.com-2014-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