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을 빠져나온 이름들이
천천히 망각의 강을 건너는 동안
새로 나타난 이름들이
빈 구멍들을 메워 가리라
내가 수첩을 정리하는 동안
누군가의 수첩에도 구멍이 생기고
그 구멍을 빠져나온 내 이름이
새로운 구멍을 찾아다니리니
더 이상 키가 자라지 않던 순간부터 시작된
이 무미건조한 작업이 끝나는 날
내가 돌아갈 구멍은 어디에도 없으리라
그 날의 쓸쓸함을 위해, 새해여
나는 너에게 무엇을 바쳐야 하겠니
그 동안 버린 낡은 수첩들만큼이나 두꺼워진
내 얼굴을 갈고 닦는 일 말고
열심히 갈고 닦아 투명해지는 일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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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환=1961년 충북 청주 출생.
1997년 계간지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
시집 '푸른 삼각뿔' 『끊어진 현』 등.
바람처럼 또 한 해가 흘렀습니다. 잠잘 날 없는 바람은 사정없이 온몸을 할퀴고 가고,
더러 상처 난 가슴을 어루만져 눈물을 닦아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몸에는 또 몇 개
빈 구멍이 생겨나고, 바람이 데려다 준 새 이름으로 빈 구멍을 채우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갈수록 헐거워지는 구멍들은 맞춤하게 메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열심히 얼굴을
문질러 투명하게 갈고 닦아보지만 마침내 우리 돌아갈 구멍은 어디에도 없으니 그 또한
쓸쓸한 일입니다. 그 채울 수 없는 쓸쓸함을 위하여 이 아침, 방금 솟은 따끈한 햇덩이
하나씩 품어 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