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빛 / 안효희
좁고 구불구불한 범일동
뒷골목에서 뜨거운 칼국수를 먹는다
길고 긴 면발 겁 없이 툭툭 잘라먹으며
걸죽한 국물, 한 그릇 사약처럼
마신다 아낙의 닳은 엄지 같은 생이
그릇 속으로 푹푹 빠지고 핏발선
열병, 붉은 고춧가루로 떠다닌다
구겨진 온몸 조금씩 가늘어진다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갈망과 살아도
만져지지 않는 날 속에서 창밖은
자꾸 어두워진다 백열등 불빛 아래
뜨겁고 매운 침 꿀꺽!
삼킨다
뭉툭하게 목에 가슴에 걸리는,
-시집 '꽃잎 같은 새벽 네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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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효희=1958 부산 출생. 1999 '시와사상' 등단. 시집 '꽃잎 같은 새벽 네 시'.
먹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먹는가, 분명 후자라고 대답해야 할 것 같은데, 다시
생각해보면 전자 같기도 하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에 이르면 사는 것과 먹는 것은
심장이 붙은 샴쌍둥이다. 떼래야 뗄 수 없다. 먹는 일의 고귀함보다 먹는 일의 누추함
때문에 울컥 하는때가 있다. 형이상학적 순간에도 눈치 없이 꼬르륵거리며 배가
고파 온다.
가슴 아픈 순간에도 꾸역꾸역 소화시킨다. 어제도 먹고 오늘도 먹었는데 내일 또
먹어야 한다. '살아도 만져지지 않는 날' 삶의 골목은 구불구불하고, 생은 닳아 가늘어
지는데, 채워지지 않는 욕망 속으로 비치는 불빛은 닳지 않는 희망이어야 하리, 칼국수
에는 칼이 없다. 최정란·시인 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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