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마에 미국 가는 친구
이메일과 전화에 매달려 서울서처럼 살다가
자식 곁에서 죽겠다고 하지만
늦가을 비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 인사동에서 만나
따끈한 오뎅 안주로
천천히 한잔할 도리는 없겠구나.
허나 같이 살다 누가 먼저 세상 뜨는 것보다
서로의 추억이 반짝일 때 헤어지는 맛도 있겠다.
잘 가거라.
박테리아들도 둘로 갈라질 때 쾌락이 없다면
왜 힘들여 갈라지겠는가?
허허.
-----------------------------------------------------------
▶황동규=출생1938년 4월 9일 (평안남도 숙천)
데뷔1958년 현대문학 '시월' 등단
2011년 제3회 구상문학상 본상관련정보네이버[캐스트]
서정의 세계를 노래하는 시인
친구가 별로 없는 나의 친구 한 사람도 며칠 전에 미국으로 이민 갔다. ‘늙마’에
평생 살아온 조국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고향에 뼈를 묻겠다는 낭만적
관행이 차츰 퇴색하는 듯하다. 꼭 자식 곁에서 죽겠다기보다는 혹시 고향과 조국이
싫어진 것 아닐까? 어쩌면 세월호 참사도 앞으로 이민의 촉매로 작용하게
될지 모른다.
동기가 무엇이든 이민은 용기 있는 결단임에 틀림없다. 시인은 아직 “추억이 반짝
일 때 헤어지는 맛”을 음미하며 친구를 떠나보내지만, 착한 동포들은 한 나라 같은
도시에 살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 속에 여생을 보낼 터이니 말이다.
<김광규·시인, 한양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