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에 갇혀 그늘을 만들지 못하는 나무는
나무가 아니라고 고육을 짜내는 것이다
벽에 매달려 입김으로 연명하지는 않겠다고
벽지에 그려진 꽃마저 떨어뜨리며
나무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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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길=(1967~ )경기도 이천 出生.
<사람과 시><중원문학>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강원도 문막에서 인테리어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시집 <도배일기>는 64편으로 이루어진 연작시집이다.
가족이나 친구가 세상을 떠났을 때, 아무리 눈물 흘리고 통곡해도 애통한 감정을
다스리기는 쉽지 않다. 시신을 화장 또는 매장하고 나면 그래도 마음이 좀 가라앉는다.
물이나 흙이나 하늘로 돌아가, 자연 속에서 안식을 찾았으리라 믿으며 그제야 고인이
돌아가셨다고 느낀다.
벽을 바른 종이도 시간이 가면 색이 점점 바래고 무늬가 지워진다. 수명이 다하면 마침내
뜯겨 나가 자연으로 돌아간다. 나무로 만든 종이는 벽지 노릇을 끝내고 썩거나 불태워져
새와 짐승이 사는 산과 숲으로 돌아가서 뿌리와 잎을 지닌 나무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
것이다. 다만 이 아름다운 자연의 순환을 거부하는 비닐 벽지가 문제다. 비닐은 숲으로
돌아갈 수 없어,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김광규·시인·한양대 명예교수>
joins.com/2014.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