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1 -신달자-
무쇠같은 분노를 삭이려면
돌덩이 같은 한을 삭이려면
그 곳에 들어가 보세요
들어가도 들어가도 끝이 없는
바닥도 벽도 없이 확 트인
최초의 자연에 정신을 열어 보고 싶다면
백지에 스르르 스며들어서
온 몸이 백지가 되는 황홀을 맛보고 싶다면
세상의 먼지를 깨끗하게 씻어
산 속 샘물 같이 맑아지고 싶다면
다 받아들이고 다 쏟아내는
시리게 깊은 흰 빛(…)
정신의 정신을 만나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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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달자=(1943~ )경남 거창 출생
숙명여대 국어국문학과, 같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학위
《여상》신인여류문학상(1964),《현대문학》으로 등단(1972)
시집『봉헌문자』,『열애』등 10여권 산문집『백치애인』,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외 다수 한국불교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시와시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영랑시문학상 수상
새 생명이 태어나면 출생 신고를 하고, 세상을 떠나면 사망 신고를 한다. 인간의 삶과
죽음이 이처럼 종이에 씌어져 남는다. 한 집안의 족보나 한 나라의 역사와 지리도 종이
에 기록되어 후세에 전승된다. 종이는 찢어버리거나 태워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지만,
종이에 쓴 글이나 인쇄된 서지는 어떤 형태로든 영원히 남는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는 언제나 백지 앞에서 느끼는 고독과 공포
가 있다. 젊은 작가라면 아마도 PC 모니터의 새 글 화면 앞에서 그럴 것이다. 백지에 첫
한 줄이 열리는 순간이 정신의 근원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된다. 이른바 ‘타블라 라사
(Tabula rasa)’에 정착된 언어와 문자에서 세계의 문학과 학문이 비롯되지 않았는가.
<김광규·시인·한양대 명예교수>
joins.com/2014.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