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을 가졌는가
◇함석헌◇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救命帶)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不義)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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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1901~1989) 190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출생 1947년 월남해 퀘이커교도로서 성경강론을 했다. 1956년 <사상계>를 통해 사회비평적인 글을 발표하기 시작 1970년 <씨알의 소리>를 발간해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1989년 8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출판인이며 저술가며 논객이었던 함석헌 선생은 식민지 시절에는 독립운동가이며 시민
사회운동가였고, 제3공화국 이후 민권운동의 앞에 섰다. 그의 호는 신천(信天), 씨ㅱ, 바
보새인데 삶에 대한 철학과 자세가 엿보인다. ‘씨알’은 ‘번식을 위한 알, 종자(種子)로서
의 낱알’이다.
종내 제 몸이 사라지고 거기 자손이 번성하는 씨알. 모든 개체들이 저 하나만을 지키려
한다면 미래는 없으리라.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현실을 바꾸려면 많은 이의 제 삶
을 ‘씨알’로 삼는 각오가 필요하리라.
선생은 사람들에게 ‘씨알’로서의 각성을 독려하는 ‘씨ㅱ 사상’을 설파했다. ‘씨ㅱ 사상’은
대한민국의 다난한 역사 속에서 무교회주의를 주창한 종교인, 비폭력주의를 신조로 한
반독재 민주화 투쟁가, 사상가 등으로 산 그의 삶의 이력의 점철이기도 하다. 선생의 널리
알려진 저서로는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있다.
이 시가 실린 함석헌 시집 ‘수평선 너머’ 초판은 1953년 피란지 부산에서 발간됐다. 피식
민지 시절, 광복 직후 혼란기와 전쟁으로 이어진 어지러운 시절, 특히 세상의 ‘씨알’이 되
고자 한 의인(義人)의 삶이란 자신의 생명은 물론이고 처자의 안위마저 팽개쳐야 하는 아
슬아슬하고 외로운 것이었으리라.
그렇게 숭고한 길을 가는 이뿐 아니라 일반 소시민에게도, 시절을 불문하고 마음속에 그릴
‘그 사람’. 시인은 애타게 그 귀인을 부른다. 세상을 향해, 그리고 자기를 향해. ‘그대는 그
사람을 가졌는가’. 나는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 인가….
[황인숙시인의 행복한 시 읽기]<359> dongA.com/2015-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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