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러기
◇장석주◇
착해지지 않아도 돼. 무릎으로 기어 다니지 않아도 돼. 사막 건너 백마일, 후회 따윈 없어. 몸속에 사는 부드러운 동물, 사랑하는 것을 그냥 사랑하게 내버려두면 돼.
절망을 말해보렴, 너의. 그럼 내 절망도 말할 테니. 그러면 세계는 굴러가는 거야. 그러면 태양과 비의 맑은 자갈들은 풍경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거야.
대초원들과 깊은 숲들, 산들과 강들 너머까지. 그러면 기러기들, 맑고 푸른 공기 드높이, 다시 집으로 날아가는 거야.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너는 상상하는 대로 세계를 볼 수 있어. 기러기들, 너를 소리쳐 부르잖아,
꽥꽥거리며 달뜬 목소리로 ?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이 세상 모든 것들 그 한가운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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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1955~ )충남 논산 출생 1975 ≪월간문학≫ 시부문 신인상에 <심야>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햇빛사냥><완전주의자의 꿈><그리운 나라> <어둠에 비친다><새들은 황혼 속에 집을 짓는다> <어떤 길에 관한 기억><크고 헐렁한 바지>
성급한 마음이 봄의 전조들을 끌어당긴다. 버드나무는 연초록 잎을 피우고, 공중에는 미
나리 향이 퍼지겠지. 이른 봄 마른 덤불은 아침 햇빛에 화관(花冠)처럼 반짝이고, 청명한
하늘에 종달새 높이 떠서 지저귀겠지.
봄이 해마다 축복처럼 돌아오는 세상에서 끔찍한 불행과 고통에 짓눌린 채 살아간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너의 절망을 말해보렴. 내 절망도 말할 테니. 패악과 부조리가 전횡하는 세 상이라도 꺾이지 말고 꿋꿋하게 살자. 사랑하는 것들은 그냥 사랑하게 두고, 절망은 절망 그대로 견디자.
슬픔 이상으로 슬퍼하지 말고, 딱 제 상처만큼만 아파하자. 기러기는 날아갔다가 추워지면 다시 돌아올 테고, 당신이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상관하지 않고, 세계는 잘 굴러갈 테니까. 더 이상 착해지지 말자. 더 이상 무릎을 꿇거나 기어 다니지도 말자.
<장석주·시인> joins.com/2015.03.07
http://blog.daum.net/kdm2141/5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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