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 하 -유홍준-
고인의 슬하에는 무엇이 있나 고인의 슬하에는 고인이 있나 저녁이 있나 저녁의 슬하에는 무엇이 있나
저 외로운 지붕의 슬하에는 말더듬이가 있나 절름발이가 있나 저 어미새의 슬하에는 수컷이 있나 암컷이 있나
가만히 돌을 두드리며 묻는 밤이여 가만히 차가운 쇠붙이에 살을 대며 묻는 밤이여 이 차가운 쇠붙이의 슬하에는 무엇이 있나 이 차가운 이슬의 슬하에는 무엇이 있나
이 어긋난 뼈의 슬하에는 무엇이 있나 이 물렁한 살의 슬하에는 구더기, 구더기, 구더기가 살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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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1962년 경남 산청 출생. 1998년 『시와반시』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상가(喪家)에 모인 구두들』 『나는, 웃는다』 2002년 대산문화재단(교보생명) 창작지원금 1천만 원을 수혜 2005년 한국시인협회 제1회 <젊은 시인상>과 2006년 제 1회 <시작(詩 作)문학상>, 제2회 <이형기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우리는 다 누군가의 슬하(膝下)다. 슬하란 본디 무릎 아래, 즉 부모님 보호 아래라는 뜻이
다. 우리는 어버이의 슬하, 저녁의 슬하, 슬픔의 슬하에서 제 생을 꾸린다. 어버이의 슬하
에 어린 오남매가 있었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뜨고, 이윽고 지난 봄 어머니
도 세상을 떴다.
어버이를 여읜 오남매는 갈데없이 고인의 슬하다. 사람은 늙고 죽는다. 죽은 이에게 남은
것은 뼈의 슬하, 물렁한 살의 슬하뿐이다. 끔찍해라, 그 슬하에 꿈틀거리는 것은 구더기들
이다! 그 구더기들이 우리의 미래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장석주·시인> joins.com/2015.03.12
http://blog.daum.net/kdm2141/5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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