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물 사발
◇길상호◇
아무런 기척도 없이
가랑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누가 거기 두고 갔는지
이 빠진 사발은
똑, 똑, 똑, 지붕의 빗방울을 받아
흙먼지 가득한 입을 열었다
그릇의 중심에서
출렁이며 혀가 돋아나
잃었던 소리를 되살려 놓는 것
둥글게 둥글게 물의 파장이
연이어 물레를 돌리자
금 간 연꽃도
그릇을 다시 향기로 채웠다
사람을 보내놓고 허기졌던 빈집은
삭은 입술을 사발에 대고
모처럼 배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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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호=(1973~ )충남 논산 출생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대학원 재학.
청림문학 동인.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오동나무안에 잠들다』『 모르는척』
『 눈의 심장을 받았네』
조용조용하게 가랑비가 내리고 있다. 사람이 떠난 빈집 마당 한구석에는 사기로 만든 그
릇이 하나 놓여 있다. 사발은 위가 넓고 아래는 좁으며 굽이 있고 줄금이 나 있다. 그 그릇
은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빗방울이 똑, 똑, 똑, 떨어지자 사발이 둥근 입을 벌려 그것
을 받는다. 빗방울을 받아 다시 소리가 생겨나고 점차 물결이 생겨나고 연꽃 봉오리가 벙
글어 향기가 돈다. 심지어 빈집이 그 사발에 입을 대고 괸 봄비를 마셔 곯은 배를 채운다.
빗방울로 인해서 이 폐옥(廢屋)의 사물들은 깨어나고 그 혈색에 한결 생기가 돈다. 그리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목말라 있던 빈집이 사발의 빗물을 스스로 들이켠다는 상상력은 얼마
나 역동적인가. 시인 엘리엇(T S Eliot)이 쓴 시의 구절처럼 봄비는 생명이 잠들어 있는,
메마른 뿌리를 흔들어 깨운다.
문태준 시인 [가슴으로 읽는 시]
Chosun.com/2015.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