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로◇
봄 끝물
베란다 볕 좋다 미카엘라
빨강 고무대야에 따슨 물 가득
아버지 발딱 앉혀 닦아드린다
손 씻고 발 씻고 코도 팽 풀리고
가슴도 닦아드리고
이윽고 거기까지 닦아드리니
헤, 좋아라 애기처럼
보리 이삭처럼
뉘렇게 웃으시네
누렇게 패이시네
그새 울긋불긋 꽃 이파리 몇 장 날아들어
둥둥 대야 속 떠다니니
아버지 그걸로 또 노시니
미카엘라 건지지 않고 놔 두네
오늘만큼은 땡깡도 부리지 않으시네,
윤 교장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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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한로=(1956∼ ) 충북 영동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81년《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시「분교마을의 봄」
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안양예술고등학교 문예창작과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소만은 입하와 망종 사이의 절기, 보리 이삭 누렇게 익고 초목이 무럭무럭 자라 농촌 일손
이 한창 바쁠 때다. ‘봄 끝물’, 여름 맏물. ‘베란다 볕’도 좋아 ‘미카엘라/빨강 고무대야에
따슨 물 가득/아버지 발딱 앉혀 닦아드린다’. 정답게 세례명을 부르는 걸 보니 미카엘라는
화자의 누이 같은 아내, ‘아버지’의 딸 같은 며느리. ‘손 씻고 발 씻고 코도 팽 풀리고’, ‘이
윽고 거기까지 닦아드리니’ 아버지 ‘헤, 좋아라 애기처럼’ 웃으신단다.
육신도 정신도 ‘애기’가 된 연로하신 아버지, 하지만 다른 이의 손을 빌려 몸을 씻는 게 영
내키지 않으셨을 테다. 그래 목욕하시자 할 때면 버럭 화를 내며 ‘땡깡’을 부리셨을 테다.
욕실에 모시는 일이 전쟁이었는데 오늘은 참으로 볕 좋은 베란다에서 ‘애기처럼’ ‘윤 교장
선생’님, ‘따슨 물’에 몸 담그고 잠방잠방 물장난도 하며 웃으시네요. 미카엘라는 소만의
햇볕, ‘따슨’ 어머니의 손길로 노인의 몸을 어루만져라.
우리 모두 언젠가는 유일하게 남은 찬사가 ‘깔끔하다’일 날이 오리니. 방과 몸에서 나쁜 냄
새라도 풍기면 가족의 천대를 받을까 봐 노심초사하는 노인이 많다. 노인이 되면 여태 주
인으로 살아온 세계에서 이제 세입자가 된 듯 입지가 불안해진다. 그렇잖아도 어디에서고
존재감이 엷어지는데 가족조차 그가 없는 듯 있기를 원하기 쉽다.
다행히 베이비붐 세대인 나는 같이 늙어 가는 사람이 많아서 이전 노인들보다 외로움이 덜
한 노년을 보낼 테다. 그런데 노인은 외로울 뿐 아니라 신체도 취약하다. 머지않은 그날에
대비해서 무슨 호신술을 연마할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겠다.
[황인숙시인의 행복한 시 읽기]<414>
dongA.com/2015-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