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mekami - Bathed In Moonlight
철 거 -김 록-
24톤의 집이 무너졌다
지은 집이 폐기물이 되는 데 33년이나 걸렸다
무너진 곳을 가보니
인부가 감나무터에서 오줌을 싸고 있었다
오래된 뿌리에, 무엇을 들이대며
거름도 되지 못할 그 같은 짓을 하고 있을까
누군가는 이렇게 성(誠), 인(仁), 인(忍)을 욕되게 하고
남의 집을 허물면서
한 집안의 금붙이 동붙이를 팔아먹고
이웃집에 주기로 마음먹은 화분과 장독까지 깨부쉈다
철거 전 영산홍을 파내어 화분에 옮겨 심고
장독들은 깨끗이 닦아 놓았는데
기나긴 세월 무엇을 참고 있었기에
이같이 하찮게 무너질
어진 마음을 모셔 두고 있었을까
집하장까지 가는 길은 또 얼마나 걸릴까
정든 것에 일일이 경의를 표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불도저는
한 집안의 위엄을 뭉갤 때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어쩌면 아무것도 아니다
결국 다 버리기 위해 또 살아가는 것이다
그 공터에 다다르면
기중기는 허공의 뼛가루만 들어 옮기고 있을 것이다
이미 무너진 집을 또 무너뜨릴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터에서,
가훈을 다시 어깨에 짊어지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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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록=(1968∼ )서울에서 출생.
1998년 《작가세계》 신인상 시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광기의 다이아몬드』(열림원, 2003)와 『총체성』
(랜덤하우스, 2007) 그리고 장편소설 『악담』이 있음.
이 시가 담긴 시집 ‘불세출’은 강렬한 시어로 광기 어리고 난해한 심상을 이끌어 내는 개
성적인 시인이라고 평가받는 김록의 이름에 값한다. ‘네가 타는 그네를 매단 줄에 목이
졸리는 사람이 있다.’(시 ‘감정 살해자’), 이런 한 줄짜리 시부터 ‘네 뱃가죽에는 십자가 모
양의 칼자국이 깊숙하다.
(……)./세로로 긴 칼자국은 너를 죽이려고 하는 누군가가 개나 소를 잡는 칼로 너의 배를
길게 베었을 때 생긴 것이다. 가로로 짧은 칼자국은 너를 살리려고 하는 외과의가 메스로
너의 배를 짧게 갈랐을 때 생긴 것이다.(……)/네가 노동가를 위령가처럼 부르니 정말 귀
신이 나올 것 같겠다.
(……)/곧 좋은 소식이 올 거라고 해서 정말 좋은 소식이 오는 줄 알고 너는 기다린다. 네
가 기다릴 때 그것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죽어가는 것이다.’(시 ‘누군가는 한다’)처럼
단편소설 길이 시까지 분량도 들쭉날쭉한데, 저마다 쏠리면 쏠리는 대로 젖히면 젖히는
대로 탄탄히 균형을 잡고 있다. 허무와 퇴폐라는 잡목더미로 지어놓은 엄격할 정도로 명
징한 의식의 집이라고 할까. 읽어봐야 맛을 알 테니 일독을 권한다.
‘인부가 감나무터에서 오줌을 싸고 있었다’, ‘기나긴 세월’ 살아온 한 생명의 갓 베어나간
자리, 하얀 그루터기에 오줌을 ‘갈기는’ 무례하고 잔인함이여. 실제 그랬을 ‘철거 인부’는
‘존재의 위엄’을 모독하는 모든 무뢰한의 알레고리이다. 마지막 두 행에서 화자의 날 선 미
감과 얽힌 도덕적 보수성이 엿보인다.
[황인숙시인의 행복한 시 읽기]<420>
dongA.com/2015-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