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등대를 세운 사람의 등대는 누가 세웠을까.
물의 사람들은 다 배화교의 신자들.
폭우와 어둠을 뚫고 생의 노를 저어
부서진 배를 바닷가에 댄다
등대 근처에 아무렇게나 배를 비끄러매고,
희미한 등불이 기다리는 집으로
험한 바다 물결보다 더 가파른 길을 걷는다.
내 생의 등대가 저 깜빡이는 불빛 아니던가.
허기진 배로 문을 열면 희미한 불빛 아래
난파한 배처럼 이리저리 널린 가족들.
내가 저 어린 것들의 등대란 말인가 하면서
그 곁에 지친 몸을 누이고 등불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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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굉=(1952∼ )경북 영양 출생.
안동교육대학, 영남대학교 대학원 졸업.
1982년 『심상』 신인상으로 문단에 데뷔하다.
시집 『장 주네를 생각함』, 『아픈 섬을 거느리고』,
『밖을 내다보는 남자』, 『철학하는 엘리베이터』를 출간
제13회 대구시인협상(2003)을 수상하다.
<<네 사람>>, <<신감각>> 동인
화자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어둠 속에서 풍랑을 헤치는 듯 막막하고 고독한 가장
이다. 늦은 밤, 생의 짜디짠 물을 온몸에 뒤집어쓰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질벅
질벅 무겁다. 그 길이 ‘험한 바다 물결보다 더 가파르’단다.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
는 지형도 가파르기 십상이고, 그 골목은 그들의 발자국으로 어둡고 축축할 테다.
즐거운 곳에서는 아무데서도 오라는 데 없고, 유일하게 나를 위한 ‘희미한 등불이 기다
리는’ 집, 내 작은 집을 찾아드는데 왜 이렇게 와락 피로가 몰려오고 비애가 밀려드는
걸까. 거기 ‘허기진 배로 문을 열면 희미한 불빛 아래/난파한 배처럼 이리저리 널린 가족
들’이 있으니까.
언덕 위의 하얀 집에 사는 사람들은 행복하겠지. 엄마도 아빠도 아이들도, 온 가족이 행
복할 거야. 난파한 ‘물의 가족’은 행복하지 않다. 시시한 아버지와 어머니, 시원찮은 아이
들이라고 이 시대는 재단한다. 늙고 무능한 부모와 별 볼 일 없는 미혼의 다 큰 자식들이
서로를 짐스러워하며 사는 가족도 있으리라. 제 몸을 살라 다른 이의 빛이 되는 일은 가
족 간에도 드물다.
자식들은 어떻게 이 지긋지긋한 집에서 벗어날까 궁리할 테지만, 부모는 벗어날 길이
없다. 가난의 냄새, 불화의 냄새, 파탄의 냄새! 오, 하느님, 우리 가족이 끝내 그렇게 되
지 않게 해주소서! ‘내가 저 어린 것들의 등대란 말인가 하면서’ ‘그 곁에 지친 몸을’ 누
이는 가장들의 등대는 누가 돼 줄까.
[황인숙시인의 행복한 시 읽기]<424>
dongA.com/2015.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