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밤 집집마다 문 닫고 자는데
성안 가득 비바람이 찬 하늘에 몰아친다.
“점치세요!” 외치는 이 어느 집 자식일까?
내일 아침 쌀 살 돈이 모자라는 모양이다.*
밤 새워 글을 짓지만
남는 것은 언제나 연필 한 자루
가장 된 삼십 년
살아온 절반이 빚이었는데
빚으로 빚을 살며
빚 없이 살아본 세월이 없는데
별빛도 달빛도 내게는 다 빚이었는데
새벽에 마신 술은 이자를 묻지 않고
날이 밝기 전에
숙취는 반드시 돌려달라고.
*범성대(1126~1193)의 「밤에 앉아 있노라니」
전문, 류종목이 옮긴 글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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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능표=(1959∼ )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와
경기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4년 [문예중앙] 겨울호에 ‘스물여섯 번째의 산책’
‘눈’ ‘미완의 풀’ 등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 [이상한 나라] [슬픈 암살] 외에 몇 권의 동화책을 썼다.
긴 제목이 인상적인 시다. 오죽하면 찬 하늘 아래 비바람 몰아치는 밤에 “점치세요!” 외치
며 성안을 헤맬까. 필시 내일 아침 쌀 살 돈이 없는 것이리라. 밤 새워 글 쓰는 이도 옛사람
과 다를 바 없는 처지일 게다.
“빚 없이 살아본 세월”이 없다 하고, “별빛도 달빛”도 다 빚이라 하니 기막히지 않는가!
삶이 고달픈 것은 빚으로 빚을 막다가 죽어야만 비소로 벗어날 수 있는 지긋지긋한 빚 탓!
나도 새벽 술을 취하도록 마신 적이 있다. 빚으로 빚을 막다가 지친 날들의 그 새벽 무운
번뇌를 벗자고!
<장석주·시인>
joins.com/2015.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