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매(墨梅)
◇강영은◇
휘종의 화가들은 시(詩)를 즐겨 그렸다
산 속에 숨은 절을 읊기 위하여
산 아래 물 긷는 중을 그려
절을 그리지 않았고
꽃밭을 달리는 말을 그릴 때에는 말발굽에
나비를 그리고 꽃을 그리지 않았다
몸속에 절을 세우고
나비 속에 꽃을 숨긴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에 붓을 묻었다
사람이 안 보인다고 공산(空山)이겠는가
매화나무 등걸이 꽃피는 밤,
당신을 그리려다 나를 그렸다
늙은 수간(樹幹)과 마들가리는 안개비로
비백(飛白)질하고 골 깊이 번지는 먹물 찍어
물 위에 떠가는 매화 꽃잎만 그렸다
처음 붓질했던 마음에 짙은 암벽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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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은=(1956∼ )제주에서 출생.
2000년 계간문학지 《미네르바》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녹색비단구렁이』, 『최초의 그늘』 등
시예술상 우수작품상(2006년) 한국시문학상(2012년)
현재 한국시인협회 중앙위원,
서울과학기술대학(구) 산업대 평생교육원 출강.
먹물 찍어 매화를 치는 이의 고요한 마음을 헤아려 본다. 인내와 쇠락이, 누추함과 갈망
이 마음속에서 어떻게 길항하며 깃들어 있는지를. 화가들은 안 보이는 것들을 표현하려
고 보이는 것들을 그린다.
산 중에 숨은 절을 그리려고 물 긷는 중을 그리고, 꽃밭을 달려온 말을 그리려고 말발굽
주변에 나비를 그린다. 시인은 무심코 “당신을 그리려다 나를 그렸다”고 고백한다. 늙은
매화가지 등걸에 꽃 피는데, 당신은 여기에 없고 보이지 않기에 ‘나’를 그린 것이다.
<장석주·시인>
joins.com/2015.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