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치꽃은
상치 대궁만큼 웃네.
아욱꽃은
아욱 대궁만큼
잔 한잔 비우고
잔 비우고
배꼽
내놓고 웃네.
이끼 낀
돌담
아 이즈러진 달이
실낱 같다는
시인의 이름
잊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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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래=(1925~1980) 충남 논산 출생
1956《현대문학》에 시「가을의 노래」추천
시집『싸락눈』,『강아지풀』,『백발의 꽃대궁』,
유고시집『먼 바다』 등
산문집『우리 물빛 사랑이 풀꽃으로 피어나면』
1961년 충남문화상,1980년 한국문학 작가상 수상
아욱 잎은 국 끓여 먹고, 상추 잎은 생것을 쌈으로 먹고. 먹을거리로만 그 잎을 보아 온 사
람들은 상추와 아욱도 꽃이 핀다는 당연한 사실을 잊기 쉬우리. 때는 한여름, 해는 저의 긴
날을 늘어지는 걸음으로 지나고 있었을 테다.
마루에 앉아 ‘잔 한잔 비우고/잔 비우’며 건너다보는 마당 텃밭에 ‘상치꽃은/상치 대궁만큼
웃네.//아욱꽃은 아욱 대궁만큼’ 웃네. 남겨진 대궁마다 함초롬히 상추꽃 아욱꽃, 화자가 보
기 좋은 높이로 피었으리.
화자는 ‘배꼽/내놓고 웃네’. 자기 집에 있는데 무더운 날에 옷을 대충 걸친들 어떠랴. 화자는
러닝셔츠를 가슴께로 훌떡 걷어 올리고 있을 테다. 어쩌면 웃통을 벗고 있을지도. 상추와 아
욱도 ‘배꼽/내놓고 웃네’. 꽃은 식물의 배꼽, 씨앗의 근원이라네. 꽃이 없으면 세대에서 세대
로 어찌 이어지리.
그러니 상추와 아욱의 꽃은 임부의 자랑인 불룩한 배인 것, 그 배꼽인 것. 꽃 핀 텃밭을 정답
게 완상하며 술을 마시는 나른한 흔쾌함이 ‘이끼 낀/돌담’부터 편치 않은 정조로 바뀐다. 하
루 이틀 전까지 이어졌을 장마에 이끼 무성해진 돌담은 볕이 안 들어 축축하리라.
그 위로 저물어가는 하늘 동편에 실낱같은 달이 뜨고, 문득 ‘이즈러진 달이/실낱같다는’ 시
구가 떠오르는데 그 ‘시인의 이름’ 떠오르지 않고. 어떤 부분은 더 선명하고 어떤 부분은 더
가물가물한 명정 상태에서 왠지 화자의 기분이, 술 잘 마셔놓고, 자욱이 가라앉는 듯.
박용래의 시들은 최소한의 언어로 최대한의 세계를 담는 게 미덕인 시의 전범으로 삼을 만
하다. 독자는 그 간결한 시들이 우아하게 이끄는 정답고 소박한 세계에서 가슴 아릿한 원초
적 향수에 젖어든다.
[황인숙시인의 행복한 시 읽기]<444>
dongA.com/2015-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