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발
◆문정희◆
큰 거울 달린 방에 신부가 앉아 있네
웨딩마치가 울리면 한 번도 안 가본 곳을 향해
곧 첫발을 내디딜 순서를 기다리고 있네
텅 비어 있고 아무 장식도 없는 곳
한번 들어가면 돌아 나오기 힘든 곳을 향해
다른 신부들도 그랬듯이 베일을 쓰고
순간 베일 속으로 빙벽이 다가들었지
두 발이 그대로 얼어붙는
각성의 날카로운 얼음 칼이 날아왔지
지금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구나!
두 무릎을 벌떡 세우고 일어서야 하는 순간
하객들이 일제히 박수치는 소리가 들려왔지
촛불이 흔들리고 웨딩마치가 울려퍼졌지
얼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람처럼 사라져야 할 텐데
이 모든 일이 가격을 흥정할 수 없이
휘황한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었네
검은 양복이 흰 손을 내밀고 있었네
행복의 문 열리어라!
전통이 웃음을 흘리며 베일을 걷어 올렸네
난해한 행복이 출렁이는 바다를 향해
풍덩! 몸을 던지는 소리가 들려왔네
무사히 아름다운 혼례가 치러지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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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1947~ )전남 보성 출생.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오라, 거짓 사랑아’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다산의 처녀’ ‘카르마의 바다’ 등.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웨덴어, 스페인어, 인도네시아어,
알바니아어 등으로 시집 번역 출간.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 수상. 현재 동국대 석좌교수, 한국시인협회장.
생애 가장 정성껏 아름답게 꾸민 신부가 예식을 앞두고 대기실에 앉아 느끼는 두려움과 불
안, 고독을 보여주는 시다.
‘지금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구나!’는 결혼 상대를 잘못 선택했다는 뜻이 아니다. “잘 다녀
오겠습니다!” 할 수 없는, 여태와는 멀고 다른 삶으로의 이민을 눈앞에 둔 소스라침이다.
많은 기혼여성이 가장 아름다웠고 행복했던 날로 자기 결혼식 날을 꼽는다. 모든 신부에게
이날이 행복한 첫날이기를!
[황인숙시인의 행복한 시 읽기]<008>
dongA.com/2012-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