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골목 풍경
◆이동순◆
내가 만약 서역에 산다면
여름날 저녁마다
문 앞에 탁자를 내다놓고 장기를 두리라
벗들과 모여앉아 마작을 하리라
손주녀석 안고 나와 바람 쐬며 행인을 보리라
친한 이웃들과 삿자리 깔고 모여앉아 담소 나누리라
침침한 전등불 켜진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으리라
노천 과일가게에서 흥정을 하리라
매캐한 연기 휘감아올리며
목로주점에 앉아 석쇠 위에 양고기 구우리라
그곳에서 독한 고량술도 한잔 하리라
잠시 후 술이 오르면
밤 불빛에 울긋불긋 드러나는 간판들과
채색된 대문들을 바라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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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1950~ )경상북도 금릉 출생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마왕의 잠]등단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지금 그리운 사람은>,등
시인, 영남대학 교수,문학평론가, 정지용 문학상 수상
대문 앞에 탁자를 내다놓고 장기를 두고, 벗들과 마작 하는 모습은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목가적 풍경이다. 손주를 돌보며 벗들과 담소를 나누고, 목로주점에서 양고기를 굽고 고
량술 한잔 하며 짬짬이 즐거움을 누리던 “뒷골목 풍경”의 시대는 벌써 사라진 옛날이 되
고 말았다.
인류는 저 낙후된 옛날에서 놀라운 첨단 기술의 시대로 넘어왔지만 행복의 총량이 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내면의 불안과 두려움은 더 커졌다. 아아, 좋은 것들은 다
지나간 시대에 있었다! 이 시는 옛날이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유토피아라는 핵심적 실체
를 전한다.
<장석주·시인>
joins.com/2015.0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