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끝의 봄
◆김병호◆
수도원 뒤뜰에서
견습 수녀가 비질을 한다
목련나무 한 그루
툭, 툭, 시시한 농담을 던진다
꽃잎은 금세 멍이 들고
수녀는 떨어진 얼굴을 지운다
샛길 하나 없이
봄이 진다
이편에서 살아보기도 전에
늙어버린, 꽃이 다 그늘인 시절
밤새 혼자 싼 보따리처럼
깡마른 가지에 목련이 얹혀 있다
여직 기다리는 게 있냐고
물어보는 햇살
담장 밖의 희미한 기척들이
물큰물큰 돋는, 세상 끝의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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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호=(1971∼ )광주에서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同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1997년 《월간 문학》 신인상과 2003년 《문화일보》 신춘
문예 시부문에 당선. 2001년 문화예술진흥원의 신진작가
창작지원기금 수혜. 저서로는 『주제로 읽는 우리 근대시』와
시집 『달 안을 걷다』(천년의시작, 2006)가 있음.
봄 풍경으로 ‘세상의 모든 가을’을 보여주는 듯, 정갈하고 고적한 시다. ‘밤새 혼자 싼 보
따리처럼’…. 어쩌면 이렇게 표현했을까! 견습 수녀의 수도원에 들기 전 마음 한 자리를
엿보게 하는 한편, 깡마른 나뭇가지에 해쓱하게 얹힌 목련 꽃이 선연히 떠오른다.
‘꽃이 다 그늘인 시절.’ 젊음이 다 그늘인 어떤 인생. 봄기운으로 생동하는 속세의 기척에
수도원 담장 안 오후의 햇살이 세상 끝인 양 아득해진다. 아득하면 깊으리. 울림이 깊은
이 시처럼, 시 속의 견습 수녀도, 그리고 젊어 본 적 없이 나이 든, 봄여름 없이 훌쩍 가을
인 사람들도 그 삶이 더욱 깊으리라.
[황인숙시인의 행복한 시 읽기]<023>
dongA.com/2012-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