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와서
힘줄을 빼놓고
그대로 서 있으라 한다
그대로 서서 바라보라 한다
엑스레이 투시기처럼 내장을,
말갛게 들여다보이는
이 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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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철=(1956∼ )전남 나주 출생 전남대 대학원 졸업
시인이자 성형외과 원장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산포 1> 당선 등단 시집 <무등에 올라><동해일기>
<그대를 부르는 순간 꽃이 되는><아름다운 손><긴 사랑>외
병원에 가서 내장을 다 드러내 보여도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영지(靈知·
gnosis)의 순간 혹은 치명적 실수를 통해 우리의 영적 자아가 “말갛게 들여다보일 때”, 우리
는 얼마나 죄스럽고 부끄러운가. 얼마나 참담한가.
그러할 때 “가을은 와서” 그것을 외면하지 말고, “힘줄을 빼놓고” “그대로 서서” 바라보라
고 주문한다. 조락(凋落)의 계절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왜 가을만이겠는가. 이파리 하
나 없는 겨울나무들처럼 모든 위장(僞裝)의 장식을 다 떨궈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낮아진다.
그 상태로 그대로 살아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그러니 매일 힘을 빼는 노력을 할 수밖에.
수치의 순간을 뼈아프게 기억하는 것, 정신의 내장을 “말갛게” 들여다보는 것. 나해철 시집
『긴 사랑』에 수록.
<오민석 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joins.com/2015.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