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거리 나무
◈고훈실◈
우산을 접는다
해진 얼굴을 달고
익숙해진 눈발 속
헝클어진 것들을 생각한다
베네치아 수제 레이스는
격자 창살을 달고 있다 여자의
손 끝에서 흰 창문이 하나씩 태어날 때
심장이 몇 올씩 빠져나간다
닫힌 우산 속에 오래 신음한 표정이 얼어붙고
지금은 우두커니 서 있어
붉은 손목으로 울음을 받쳐 든다
늦게 돌아온 여자의 창이 켜진다
감각을 갖는다는 건 너무 큰 형벌, 수관을 덮고 적막한
연애를 견딘다
안으로 오그라드는 물음은
여자가 내게 던진 한 타래의 그늘 때문
앙다문 잎 축 처진 어깨로 만져지지 않을
해답을 기다린다
자리를 내어 준 사랑은 이파리가 젖는다
대책 없이
서귀포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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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훈실=제주 출생
2010년 월간 시문학 신인상 등단
시집 '시를 위한 알레그로'(2014·공저)
〈시작노트〉
늘푸른 굴거리나무를 보신 적이 있나요. 한라산 중턱에서 온 몸을 접은 채 골똘하던, 그 서늘
한 사랑을 내내 잊을 수가 없습니다
kookje.co.kr/2016-04-17